“종교는 물심양면으로 기여해야 합니다”

수행은 마음닦기와 공덕닦기
삶은 밀고 당기는 밀당이지만 
너무 밀당 말고 기여했으면…

매년 구절초 축제로 ‘포교’ 
청소년 교도소 군포교 지원
수행하면 불교 미래도 ‘쾌청’ 

모든 존재의 공존공영과 평등행복을 원력으로 정진하는 영평사 주지 환성스님.

하나도 남김없이 주는 꽃이 있다. 꽃을 말려 차로 마실 수도 있고, 어린 순은 나물로 먹거리가 된다. 약용으로도 쓰이니 약사여래(藥師如來)와 다름없다. 구절초다. 세종특별자치시 장군산에는 영평사(주지 환성스님)가 20년 가까이 가꾼 구절초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화엄세계(華嚴世界)에 온 듯 아름다운 착각에 빠지게 한다. 가을이 머리를 조금 숙인 지난 10월19일 영평사 주지 환성스님을 만났다. 구절초 차에서 우러나온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자연스럽게 구절초가 화제가 됐다. 

“사람이 변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순백색 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60을 넘으니 모든 꽃이 다 예뻐 보입니다. 희한한 일이죠.” 환성스님은 “구절초를 알게 된 것도 출가할 때부터”라면서 “어는 산에 자리한 묘 곁에서 자라고 있는 구절초가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회고했다. 한국의 가을을 대표하는 꽃을 꼽으라면 구절초다. 꽃말이 ‘가을 여인’인 구절초는 울긋불긋 색깔을 뽐내는 코스모스에 비해 소박하면서 정갈하다. 

수덕사에서 출가한 뒤에 정혜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한 스님은 1987년 지금의 영평사 자리에 왔다. 구절초가 눈에 들어왔다. 도량이 지금처럼 넓지 않았다. 조금씩 가꾸다 보니 군락을 이뤘다. 혼자 보기에 너무 안타까웠다. 주변 권유로 작은 축제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환희심이 났다”고 회고한 환성스님은 “어느 해 10월 끝자락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는 행복을 느꼈다”면서 “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면 그것도 출가자가 해볼 만한 나눔이고 보시”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영평사 구절초 축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첫해는 1000여 명이 다녀갔고, 해를 거듭하면서 찾는 이들이 늘었다. 한동안 줄었다 세종시가 생긴 후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구절초 축제를 보려고 멀리 인천이나 광주에서도 옵니다. 축제 기간인 10월에 7~8만명 정도 다녀갑니다. 평일에도 꾸준하죠. 특히 이번 연휴 기간에는 엄청 왔습니다. 신도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청빈한 분위기의 구절초는 홀로 자라지 않는다. 무리지어 사는 모습이 도반들과 대중생활을 하는 수행자 같다. 그윽하게 풍기는 꽃내음은 화려한 외형보다는 내면에 충실해서 더 좋다. “축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교가 되니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환성스님은 “불자들은 꽃을 보러 와 부처님께 한번이라도 절을 더한다”면서 “비불자들도 불교에 호감을 갖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영평사에서 세종시 정부종합청사까지는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가까운 거리다. 점심시간이나 휴일을 이용해 방문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다. 몇 해 전 공무원불자회 초청을 받은 환성스님은 “수행을 잘 하자”고 법문 했다. “김밥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법회에 참여하는 그분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불교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불자가 300만명이 줄었다고 걱정이 많다. 하지만 환성스님은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출가자들이 잘하면 (불자는) 늘어난다”고 했다. “종교, 특히 불교는 (인생을 살면서) 무상(無常)을 느껴 귀의하는 일이 많습니다. 인생살이에서 무상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니 다른 종교는 다 없어져도 불교는 더 승(昇)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스님은 “불교는 윤회(輪廻)를 믿는데, 전생부터 (불교의) 씨앗을 심어놓은 이들이 많다”면서 “다만 (지금도) 불교의 씨앗을 새로 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연을 이야기 하면서 씨앗을 새로 심는 것을 게을리 하는 현실입니다. 출ㆍ재가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인연법(因緣法)을 잘 믿지 않고 심지어 미신으로 치부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철저하게 인과론(因果論)대로 살면서 전도(傳道)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가 될 만한 이야기를 청했다. 그러자 스님은 “나도 힘들다”면서 미소 지었다. “힘들지 않는 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잘 살려고 하면 더 힘든 게 당연하죠.” 스님이 말을 이어갔다. “사람을 포함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기여(寄與)’하려고 나왔습니다.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돌멩이 한 개도 세상에 기여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현재 자기의 능력이나 역량이 어떻게 됐든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했다. “출가자니까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스님은 “세상 사람들은 한가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삶은 밀고 당기는 ‘밀당’이지만, 너무 밀고 당기지 말고 기여하라”고 당부했다.

불교의 사회적 기여에 대해 환성스님은 “종교는 정신적 기여를 하는 것이 주이지만,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기여해야 한다”면서 “우리가 물질세계에 살고 있고, 몸도 물질이다. 물질이 없으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재가불자도 생활에서 불법을 실천하며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재가불자들도 훌륭한 분이 많다”는 것이 스님 생각이다.

1987년에 폐사지 효제암 복원불사를 시작한 후 정기법회에 이어 어린이법회를 시작했다. 인근 학교 4곳에 하루만 임대한 봉고차에 아이들을 태워 사찰로 오게 했다. 방학에 불교학교까지 하니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골 신도들에게 어린이법회에 보시를 권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수익사업에 뛰어 들었다. 

환성스님은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면서 “백장선사(百丈禪師) 청규(淸規)를 모두 지키지는 못해도 ‘일하면서 수행하고 전법한다’는 원력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어린이법회와 학생회를 중심으로 청소년포교에 앞장서는 영평사는 지난 9월 제9회 나란다축제에 참가한 청소년 12명이 모두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다고 스님들이 직접 수익 사업을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아이템을 제공해 불자들이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경영에 직접 뛰어 드는 것은 반대입니다.” 

은사는 원로의원을 역임한 응담스님이다. 어떤 분이었을까? “시자도 없이 지내셨습니다. 모심을 당하려고 하지 않으셨죠. 양말 신발 하나도 상좌들이 씻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설령 저희가 씻어 놓으면 ‘죽을 때까지 해 줄거야’라며 당신이 다시 씻으셨을 정도였습니다.” 돈 들여 옷 한 벌 해 입지 않고, 양말도 버린 것을 주어 사용했을 만큼 청빈했다. 상좌들에게는 “출가자는 물욕(物慾)에 들면 안되고, 수행해 자기를 밝히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환성스님은 수행정진하며 지남(指南)으로 삼는 경전 구절을 묻는 질문에 “요즘에는 정토불교(淨土佛敎)에 조금씩 관심을 갖는다”면서 “신도들에게 아미타불 염불을 권장한다”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한국 선종에서는 염불을 근기 약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쉬운 수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어렵지요. 천 가지 수행문(修行門)이 있다면 다 같은 겁니다.” 스님은 “수행법 보다는 발심(發心)을 했는지 안했는지가 중요하다”면서 “올바른 스승을 만나는 것도 홍복(弘福)”이라고 했다. 

수좌로 정진한 이력이 있는 스님이 권하는 염불 수행이 생소했다. 환성스님은 “참구염(參究念佛)이라는 것이 있는데, 염불과 선을 겸하는 염불선(念佛禪)이 그것”이라고 했다.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禪師)는 ‘선정만 있고 염불이 없으면 만명이면 만명 다 미끌어지지만, 선정은 없더라도 염불이 있으면 만명이면 만명이 다 성공한다’고 할 정도로 염불을 권했습니다.”

환성스님은 “불교 수행은 마음 닦기와 공덕 닦기”라면서 “마음 닦기와 공덕 닦기를 완성해야 ‘부처’”라고 했다. “깨달아 고상한 말을 하는 것이 부처가 아닙니다. 마음과 공덕을 같이 닦아 완성해야 부처입니다. (저도) 금생에 (이것을) 완성한다면 더 좋겠지요. 하하.” 

환성스님은…  
법명은 환성(幻惺), 법호는 광원(光源)이다.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수덕사에서 벽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법주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은사는 응담스님. 1969년 10월 정혜사에서 수선안거 이래 18하안거를 성만했다. 1987년 효제암 복원불사를 발원하며 영평사를 창건했다. 1990년 공주시 불교사암연합회를 창립해 초대, 2대, 5대 회장을 역임했다. 법무부 공주교도소 종교위원(1991년),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공주시 지부장(1995년)을 지내고, 공주청소년자원봉사센터(1998년)와 사단법인 금강청소년문화진흥원(2008년)을 설립했다. 현재 사단법인 금강청소년문화진흥원 이사장, 영평 공덕회 회주, 세종경찰서 충남지방경찰청 경승, 영평불교대학장, 세종시사암연합회장, 세종시불교신행단체연합회 회주.

[불교신문3342호/2017년11월4일자] 

세종=이성수 기자 이시영 충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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