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이 지나 도량이 한가롭다. 잔디밭에 풀을 뽑는데 초대하지 않아도 등 위에 내려앉는 맑고 가벼운 가을 햇살이 아깝다. 일손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는다. 가을 햇살과 바람이 데려 온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참 고맙다는 생각 뿐. 세상사는 잠시 작은 고요에 젖은 감사함도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크고 작은 자동차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가고, 머리 위 하늘 길에는 낮게 날고 있는 헬리콥터 소리가 그 소박한 감사함을 방해한다. 그러나 나의 작은 고요에 대한 감사함을 허락하지 않고 방해 받았다고 하기 에는 애교스러운 정경들이다. 각자 그 역할에 따라 다른 소리로 존재감을 확인시키며 치열한 삶이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에 말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을 지금 내가 행동으로 하고 있다. 일손 놓은 김에 들어 와 컴퓨터를 켜고 오늘 내가 한 생각을 옮긴다. 방송 준비하며 읽은 고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無風雨 不知花之可惜 故風雨者 眞惜花者也. 無患難 不知才之可愛 故患難者 眞愛才者也. 風雨不能因惜花而止 患難不能因愛才而止.” 풀어서 옮겨 보면 이렇다. “비바람이 없다면 꽃이 아낄만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참으로 비바람이야 말로 꽃을 아끼는 것”이라고 하겠다. 환난이 없으면 재주가 아낄만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환난이란 것은 진실로 재주 있는 사람을 아끼는 것이다. 비바람은 능히 꽃을 아끼는 것을 그칠 수 없고, 환난은 능히 재주를 아껴 멈출 수 없다. 옛 사람들의 지혜는 가을 햇살만큼이나 맑고 감사하다. 

비바람과 꽃의 입장, 우환과 재주 있는 자의 입장. 나는 어느 입장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비바람을 탓하지 않는 꽃이 되고, 우환을 미워하지 않는 재주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하고 망상을 해본다. 

저 햇살에 세간과 출세간사 실익에 부침하며, 걸어 온 시간 속으로 감추어버린 곰팡이 난 양심들 뽀송뽀송하게 말리면 좋겠다는 망상 한 가지 내어주고 가을 햇살 한 줌 내 안에 들여 놓는다. 그래도 햇살이 아까워 나는 꽃씨와 칼슘나무 씨앗을 말린다. 내년에 이 도량을 찾는 길손의 환희를 위하여.

[불교신문3337호/2017년10월21일자] 

진명스님 논설위원·시흥 법련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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