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탐욕 빠질수록 국가 위태로워
모든 출가자에게 의식주 모두 평등 
사후에 모두가 ‘공동재산’으로 환원 

불공정한 배분 문제도 금방 시정돼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지혜 던져줘

부처님은 출가하신 후에도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경전의 구절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후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고 교단이 형성된 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을 방문한다. 부처님의 아내는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에게 아버지는 굉장한 재산이 있으니 유산을 나누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부추긴다.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사유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어떤 출가자는 많은 재산을 남기고 죽었는데 재산이 너무 많아 왕이 탐냈다는 구절도 있다. 출가자들이 방을 서로 교환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승가 내에서도 개인 소유물이 분명 있었다. 승가에는 개인소유와 공동소유가 구분돼 있었으며 공동소유에도 공동임을 표시하고 개인소유의 경우는 누구에게 속하는지 표시했다.

보시하는 사람이 집을 지어서 한 비구니에게 주고 그 비구니 사후에 소유권 분쟁이 일었다. 재판소에서 집은 보시한 사람에게 소속된다고 판결했지만 부처님은 이를 비판하면서 보시 후에는 소유권은 승가에 이전한다고 주장했다. 사유재산에 관해 국가와 승가의 인식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끼리는 주택을 서로 교환하기도 했으며 출가자와 재가자가 주택을 교환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때는 출자자가 직접 재가자와 교환하지 않고 정인(淨人)을 시켜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인은 출가자 대신 금전이나 재물에 관련된 거래를 하는 직책을 말한다. 출가자가 돈을 만지지도 못하고 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금지됐기에 정인이 필요했다. 근본율장에는 출가자가 땅을 소유했던 기록이 있고 사분율에는 땅을 나누는 행위가 기록돼 있다. 즉 “어떤 비구가 땅을 나누는데 푯말을 옮겨 박았다가 걱정하니 부처님께서 무슨 마음으로 그랬느냐고 묻자…”라고 적혀 있다. 출가자의 사유재산은 출가자의 사후에 모두가 공동재산으로 환원된다. 출가자의 사유재산 중에는 동산, 밭, 과일나무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상당히 광범위한 사유재산이 허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유재산이 허용됐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 가장 바람직한 이상향이란 소유의 개념이 없는 곳이다. 불교가 사유재산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는 이유는 사유재산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공유재산으로 유지되는 것을 바람직한 이상향의 특징으로 생각했다. <장아함경>에 의하면 부처님은 울단왈 사람이 염부제 사람보다 낫다고 말씀하면서 “나의 소유라는 것이 없다”고 설하셨다. 경전은 사유재산이 생기고 도둑질이 시작되는 것을 재화가 부족하고 인간이 욕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장아함경은 “각각 밭을 나누고 경계를 달리 해 저와 나가 있음을 계산했다”고 설명하면서 그 이전에는 사유재산이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라가 부강하려면 국민이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가 이상사회이기는 하지만 사유재산이 허용되면 소유가 확실하게 보장돼야 하며 남의 소유를 넘보는 것은 국가의 도덕과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증일아함경>은 “백성들이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으면 이것은 바깥 도둑에게 패하지 않는 여섯째 법이다”라고 설한다. 국민이 탐욕스러우면 안보와 국방에 해가 된다는 의미이다. 방위산업에 불량품을 납품하고 원전 부속품에 불량품을 공급한 기업이 적발됐다. 국민이 탐욕에 빠질수록 국가는 위태로워진다.

사유재산의 허용은 일견 사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옷이나 기타 몇 가지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지정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데도 사유재산으로 허용했다는 사실은 경제적으로 불교가 친자본, 친시장이었다는 증거다. 사유재산제도야 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유재산은 공유재산과 달리 상대적으로 보존 유지에 있어 유리하고 자산의 활용에 있어 효율적이다. 다만 탐욕을 유발하고 불공정한 자원배분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지만 교단에서 이를 보완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거액의 사유재산이 상속되지 않고 출가자 사후에는 공유재산이 되기 때문에 불공정한 자원배분의 문제는 금방 시정된다. 아무리 사유재산이 많더라도 하루 한 끼 밖에 식사하지 못하고 옷은 3벌 이상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방의 규모도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사유재산으로 인한 탐욕이나 낭비, 사치 등의 문제는 크지 않았다. 모든 출가자는 의식주에 있어서 평등하기에 사유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이로 인한 문제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제도를 오늘날 그대로 도입하기는 어렵다할지라도 우리에게 분명 많은 지혜를 던져주는 것은 사실이다.

[불교신문3337호/2017년10월21일자] 

윤성식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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