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자 의원 찾듯 배고픈 아기 어미 찾듯 공부하라”

정진은 인간을 바꾸는 ‘화로’
수행이란 끝이 없는 것으로 
많고 적음에 차별 두지 말고 
자기허물을 부끄러이 여기며

초심자는 부질없는 짓 삼가서 
바른 믿음을 갖고 마음 밝혀 
탐진치 없애도록 전심전력해야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하여 후학들의 귀감이 된 벽안법인(碧眼法印, 1901~1988)스님.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매사를 정확하게 판단했던 스님은 정화불사 후 중앙종회 의장을 3차례 역임하며 종단을 반석에 올렸다.

“3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 보물, 백년 탐한 물질은 하루아침 티끌”이라 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들의 말씀을 우리 승가는 마음 깊이 새겨, 날과 날을 헛되이 보내지 말며 알찬 정진 속에 살아가야 하리라. 

내가 처음 출가하여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초하안거(初夏安居)를 하게 됐다. 그 당시 조실스님은 고(故) 석우(石友) 노(老)화상(和尙)이고 입승은 청담화상(靑潭和尙)이며 대화주는 적음화상이었다. 한국 내에서 이름난 선객들이 모여들어 그 수는 70이 넘었다. 현 해인총림 방장 성철화상, 고(故) 지월(指月)화상도 참방(參榜)했다. 그때 스님들의 정진은 밤낮에 분별이 없었고 계행은 모두 청정하였다. 그때 나의 생각으로는 지월스님이 참된 보살이라고 여겨 큰 감명을 받았다. 스님은 말을 해도 항시 묵언과 같은 태도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복잡한 일이 있으면 “소승이 하겠습니다”하고 다라니(多羅尼) 외듯 도맡아 하곤 했다.

나는 초발심한 거사로서 말석에 참여해서 시자(侍子)노릇을 했다. 그 해가 을묘(乙卯)년이었다. 그 다음해에도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서 또한 마하연선원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했다. 그 후 제방선원(諸方禪院)을 편력(遍歷)하면서 수십 성상(星霜)을 보냈다. 정진생활은 참으로 인간을 경질(更迭)하는 야로(冶爐)이다. 이 용광로(鎔鑛爐)를 거쳐야만 승가의 본분(本分)을 그 나름대로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화(淨化) 후에는 행정부문에 발을 붙여 오늘에 이르도록 중구(衆口)에 회자(膾炙)됨을 실로 참괴하여 마지않는다. 

옛글에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하셨으니 도인(道人)의 행(行)은 무애의 길이 될 것이나 미혹(迷惑)한 이가 길에 나서면 행여 잘못됨이 없지 않다. 

승가의 본분을 지킬 수 있는 자는 하시하처(何時何處)에서도 진법(眞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 뭇 사람의 사표(師表)가 되어야 하리라. 

초심(初心) 납자는 부질없이 허황된 짓으로 세월 보내는 것을 삼가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밝혀 애욕과 분노와 우치를 벗어나는 길을 찾도록 전력해야 한다. 처음 먹은 의지를 굳게 지켜 스스로 꾸짖어 게으르지 말고, 공부 중에 잘못됨을 알았거든 즉시 고쳐서 똑바른 길로 가도록 채찍질함이 옳다. 

또한 초심자는 복잡하고 세정(世情)이 끓는 곳을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리라. 조금 공부가 되었다고 해서 서둘러 자만하고 세속만태(世俗萬態)에 휩쓸리려 한다면 마구니가 그 자에게서 끊이지 않으리라. 

관(觀)하는 힘이 없어 함부로 속단하여 제 잘난 체만 한다면 헛된 세월만 보내고 말 것이니 부지런히 자기를 닦아 관(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리하는 자는 뒤에 시정(市井)에 나서도 오욕(五慾)에 흔들리지 않아 참다운 공부를 계속하여 행하는 일이 더욱 깨끗해 질 것이다. 

이렇게 오래 계속하면 선정과 지혜가 저절로 원만해져 제 성품을 볼 수 있으며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제도하는데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혹자는 시간만 지나면 대도(大道)가 이루어지는 줄 알아 법랍 자랑하기를 즐겨하지만 수행이란 끝이 없는 것으로 수행기간이 많고 적음에 차별을 두지 말고 오직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이 여겨야 한다. 

우리 종단의 현실은 수행 생활에 집중력(集中力)을 두지 않는 승려가 너무 많다는 여론이 없지 아니하다. 종단의 여러 선지식(善知識)은 후진(後進)들을 위해서 자비(慈悲)를 베풀고 정진에 힘쓰도록 이끌어 줌으로서 청정한 승가가 대다수 나타나 국가와 민족의 복리증진에 지표(指標)가 되도록 하여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초심(初心) 납자에게 참고가 될 수 있는 옛 조사(祖師)의 게송을 소개한다. 

“자세하게 화두(話頭)를 들되 들뜨지도 말고 또한 혼침(昏沈)되지도 말라. 비고 밝음은 물에 달과 같고 늦고 급함은 거문고 줄 같아 병든 사람 의원 찾듯이 배고픈 아기 어머니 생각하듯이 공부를 친절히 하면 아침에 붉은 해가 동녘하늘에 솟아오르도다.”   

1973년 12월16일자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 제535호 2면에 실린 벽안스님의 금주의 설법. 당시 스님은 동국학원 이사장이었다.

■ 벽안스님은…

1901년 경북 월성군 내남면에서 부친 박순진(朴淳鎭) 선생과 모친 월성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스님은 3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 석우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며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었다.

제방선원에서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사문이 됐다. 43세에 부산 범어사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냈으며,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로 인재불사를 실천했다. 동국학원(지금의 동국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고, 중앙종회 의장을 세 차례 지내며 종단의 기틀을 다졌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양산 통도사에 있는 비문에는 스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선사는 천성이 교결(皎潔, 조촐하고 깨끗)하고 미목(眉目, 얼굴)이 청수(淸秀, 깨끗하고 준수)하며, 본사(本寺)의 가람을 수호하고, 제반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리(事理)에 의당(宜當)함을 따라 공평무사하게 처결(處決)하셨다.” 스님은 만년에 머물던 요사채에 ‘寂默堂(적묵당)’과 ‘淸白家風(청백가풍)’이란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당신이 지녔던 수행의 면목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붓글씨 또한 스님 성품을 닮아 단아했다. 스님은 1988년 1월14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영축편운(靈鷲片雲) 왕환무제(往還無際) 홀래홀거(忽來忽去) 여시여시(如是餘時) “영축산 조각구름/ 오고가는 짝이 없네/ 홀연히 왔다 홀연히 가니/ 이와 같고 이와 같더라.”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87세, 법납 50세. 

[불교신문3337호/2017년10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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