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때 스님 옷 입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부산불교 佛都 초석 다진 스님
염불 일가견…명예 연연치 않아 
이사원융 대보살ㆍ설법가 ‘칭송’

명리를 초월한 선승의 인품을 갖춘 석암스님은 항상 대중에게 겸양하심(謙讓下心)을 실행했다.

석암당 혜수 대종사(1911~1987)는 출가 수행자의 본분사에 충실한 일생을 산 선지식이다. 일체중생을 위해 내 한 몸의 안락과 명리를 버리고 오로지 일념 수행으로 정진하는 삶을 후학에게 보여 주었다. 부처님 법을 바르게 배우고 스스로 익혀서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갖게 불법을 널리 펼쳤다. 스님은 선사이자 율사요 대설법가요, 대보살로 칭송받고 있다. 

선사로서의 스님은 경허-혜월스님으로 이어진 선법을 전해 받은 기석호(奇昔湖)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범어사 동산스님에게서 율맥(전계대화상)을 전수했다. 스님은 변재(辯才)가 수승했다. 스님이 설법하는 법회에는 항상 많은 대중이 모여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경청했다. 스님의 설법은 고답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았다. 경문을 일러줄 때는 원문에 충실하게 해설하고 그 뜻을 새겨 설법할 때는 듣는 사람들이 잘 알아듣게 쉬운 말로 풀어서 자상히 일러주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또한 사회생활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맞게 적절한 비유와 풍부한 유머를 곁들여 설했다. 

스님이 이렇듯 설법을 하는 데는 당신 스스로 익힌 중국의 고전, 사서삼경을 비롯한 삼국지 열국지 등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성정(性情)은 너그럽고 활달했으며 포용력이 컸다. 사람에 대한 따스한 마음과 포근히 감싸는 자애로움이 넘쳤다. 승속을 불문하고 스님을 대하는 사람들은 넉넉하고 푸근한 스님의 풍모에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곤 했다. 절 살림을 맡아 운영하는데도 스님은 항상 ‘하심과 공경’의 마음을 지녔다. 대중의 안녕과 평안을 먼저 생각하고 운영하여 절 분위기를 화합하고 안정되게 이끌었다. 스님은 또한 사찰의식에도 해박했다. 염불도 잘 했다. 청아한 음성으로 뿜어져 나오는 스님의 염불소리에 대중들은 숙연해지곤 했다. 천도재 등을 지낼 때 간혹 집전하는 스님이 의식절차에 어긋날 때는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바로잡아 집행하곤 했다. 

스님은 종단의 어느 자리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다. 선암사에 머물고 부터는 선암사를 떠나지 않았다. 총무원장, 해인사 주지 등 권유가 있어도 당신이 있을 곳은 선암사라며 그런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석암스님은 불교도시라 일컬어지는 부산불교의 초석을 굳게 한 스님이다. 부산 불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오늘날의 부산이 불도(佛都)라 일컬어지는 기틀을 다졌다. 선사이고 율사로 칭송되는 스님은 사판에도 밝아 이사(理事)에 원융했다. 선암사는 경제의 자급자족을 위해 영농을 자작으로 했다. 절 한 귀퉁이에 외양간을 두고 소를 길렀다. 스님도 무논에 나가 두루 살폈다. 허벅지까지 감싸는 긴 고무장화를 신고 논을 돌보는 스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논밭 경작은 혜월스님 때부터 이어지는 선암사의 전통이다. 

 禪律 연찬…내원정사 창건

비구·보살계 500여회…석암장학회 기초 인재양성 선도

석암스님은 1911년 음력 9월29일 경기도 포천 선단리(仙壇里)에서 아버지 문화 류씨(柳氏) 동열(東烈)공과 어머니 권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재기(在氣)이다. 어릴 적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30년 19세 되던 해 황해도 신천(信川) 월정사에 입산 출가하여 완허(玩虛)스님을 은사로 운암(雲庵)율사를 계사로 득도 수계했다. 법명은 혜수.

1941년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이수했다. 그해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영명(永明)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아 지녔다. 이어 덕숭산 정혜선원의 만공스님 회상에서 수행했다. 이후 제방선원에서 참선정진한 스님은 1942년 혜월스님의 상수제자인 기석호스님과의 기연(機緣)이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석암스님이 석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선의 참된 도리입니까?(如何是眞禪)” 하니 석호스님이 즉시 답하기를 “입을 열기만 하면 잘못되느니라(開口則錯)”하고 돌연히 할(喝)! 했다. 

석암스님은 석호스님의 이 할에 그 자리에서 크게 마음의 눈이 열리는 바가 있었다(喝一喝有省). 이에 석호스님은 석암스님의 경지를 인가하고 심법(心法)을 전하고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석암(昔巖)이라 당호(堂號)를 내리고 전법게문(傳法偈文)을 써서 그것을 증거했다. 게문은 이러하다. “그대와 내가 본래 무심하니/ 전해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으나/ 전해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법을 주고받을 것 없이 주노라(汝我本無心 無傳無受者 無傳無受法 付與無受者).” 

1944년 대덕 법계를 품수하고 1946년 파계사 성전암, 1947년 팔공산 운부암, 수덕사 능인선원, 1948년 수덕사 능인선원, 파계사 성전암에서 수행하고 1949년 수덕사 능인선원을 거쳐 1950년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수행했다. 1951년 범어사 선원에서 수행, 금정사 원주를 맡았다. 

이 해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이 개원한 천화율원(千華律院)에서 일타, 지관스님과 대소승(大小乘) 오대부율장(五大部律藏) 전서(全書)를 연찬, 율학을 대성했다. 

1952년 부산 선암사에서 수행을 시작으로 스님의 선암사 주석시절이 열렸다. 1953년 선암사 총무, 1954년 선암사 주지를 맡았다. 1954년 종단의 정화불사에 참여했으며 1961년 범어사 주지에 취임하여 동산스님을 모시고 대중을 이끌면서 범어사 사격(寺格)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5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대종사로부터 전계대화상을 전수했다. 이로부터 스님은 전국 각처에서 비구계·보살계 법회를 열어 승속을 교화한 것이 500여 회에 이른다. 1967년 전국 수좌들의 모임인 선림회(禪林會) 회장에 추대됐으며 해인총림이 발족하자 초대 수좌로 모셔졌다. 

1971년 인재양성을 위해 대한불교 장학회(현 석암장학회)를 발기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3년 도솔산 내원정사(부산 서구 구덕산 꽃마을에 위치)를 창건, 불사에 진력하고 1983년 고희가 넘어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에 추대됐다. 1987년 5월13일(음력 4월16일) 밤 10시45분 내원정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승랍 58년 세수 77세. “80년 한 평생을 회고해 보니/ 마치 남가일몽이어라/ 꿈속에서 또 꿈을 말하니/ 꿈 가운데 일이 가소롭도다(回顧八十年 猶如南柯夢 夢中又說夢 可笑夢中事).” 스님의 임종게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선암사 수행정진 외호’ 만전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란으로 국토는 포화에 황폐화되고 삶의 터전을 잃고 재산과 부모형제를 잃은 피난민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출가수행자들도 전쟁의 와중에서 수행처를 잃고 방황하다 부산 선암사로 왔다. 당시 부산 범어사와 선암사는 수행자에게는 안정된 정진도량을 제공했고 전란으로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는 심신을 위로받을 수 있는 부처님 품안이었다. 선암사에는 석암스님이 이들 수행자들에게 안정된 수행공간을 제공하고 ‘하심과 공경’으로 외호했다.

당시 선암사 소림선원에는 향곡, 지월, 홍경, 무불, 서옹, 월산, 대휘, 설봉, 원경, 몽산, 찬휘, 성수, 운문, 경운, 도광, 지호, 덕유스님 등이 안거했다. 도성스님(태종사 회주), 인환스님, 김지견 박사 등은 이 무렵 선암사에서 행자생활을 했다. 

거듭 말하지만 석암스님은 부산이 ‘불교도시(佛都)’라 일컫는데 초석을 놓고 다졌으며 부산불교 발전의 큰 기틀을 다진 어른이다. 1965년 범어사 동산스님 열반 이후에는 더 더욱 석암스님의 너른 품에 의지하려는 승속간의 염원이 모두들 스님 곁을 찾게 되었다. 석암스님은 부처님 법을 경전의 자구(字句)해석이나 말로써만 그치게 하지 않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한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었다.

율사이면서도 계율을 딱딱하고 부담스런 가르침으로 여기지 않게 했다. 살아가는데, 수행하는데 힘이 되고 도움을 주는 덕목으로 여기게끔 인도했다. 당신 스스로의 삶 자체를 형식에 꺼둘리거나 율문에 얽매이게 살지 않았다. 

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안과 희망을 주는 그러한 가르침을 부처님 법에 의거하여 자상하고 부드럽게 일러주고 깨우쳐주었다. 

한 후학이 석암스님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중노릇 잘 할 수 있느냐”고. 석암스님이 답했다. “죽을 때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스님의 옷을 입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도움말 :    인환스님(서울 경국사) 
    정련스님(부산 내원정사) 
    도성스님(부산 태종사 회주)
    원응스님(함양 서암정사) 
    혜총스님(부산 감로사)
자     료 : <처처에 나툰 보살행>(석암문도회 편, 김광식 엮음), <범망경 강설>(석암문도회 편), <석암당 혜수대종사 비문>(일타스님 讚).

[불교신문3337호/2017년10월18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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