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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1 (2017).10.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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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에세이] 건봉사의 슬픈 가을 

 

전쟁 불안의 엄습

조명암, 조영암의 

시비 사이를 거니는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건봉사의 가을은

마냥 슬펐다

지난 1990년대 초입 어느 날, 휘적휘적 강원도 고성 건봉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민통선에서 해제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홀로 이곳을 찾은 것은 한때 전국 4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건봉사의 위용도 보고 싶었고, 이곳에서 법명과 법호를 받은 만해 한용운의 체취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봉사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사찰부지가 하도 넓어 새로 지은 전각들이 오히려 더 왜소해 보일 정도였다. 한때 3000여 칸의 대가람을 자랑했던 건봉사는 1878년 대형 산불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유일하게 남은 전각은, 금강저가 새겨진 기둥과 해강 김규진의 현판 글씨로 널리 알려진 불이문(不二門) 뿐이었다. 불이문 기둥에는 여전히 총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 건봉사의 사격을 피부로 느끼게 된 곳은 도량에서가 아니라 도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도밭에서 였다. 나는 산의 골짜기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도밭 앞에서 절로 합장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가 만난 부도밭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셔진 수많은 부도들도 전쟁의 참화와 도굴꾼들의 침탈을 겨우 피한 것들이었다. 원래 건봉사 경내에 산재했던 그 많은 부도들을 다 모아놓았다면 실로 상상을 초월한, 장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날부터 건봉사는 나에게 ‘슬픈 절’로 각인됐다. ‘비운의 절’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냥 형용할 수 없이 슬픈 절이었다.

며칠 전, 이 슬픈 절을 다시 다녀왔다. 그 사이에 여러 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슬픈 절’로 되살아나기는 처음이었다. 건봉사가 다시 슬픈 절로 되살아난 것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요즘의 남북 분단 현실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를 입은 절이 한 두 곳이 아니지만, 건봉사만큼 돌이킬 수 없이 전쟁의 참화를 받은 곳도 드물 터였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이후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민통선 내에서 겨우 숨만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도 도굴꾼들은 부처님 사리를 훔쳐가고 부도를 파헤쳤으니 그 슬픔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이번 참배에서 오랫동안 발길이 머문 곳은 다름 아닌 시비들 앞이었다. 건봉사는 불이문에 들어서기 전 너른 마당에 세 기의 시비를 세워 놓았다. 한용운, 조명암, 조영암의 시비가 그것이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이 조명암과 조영암의 시비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한용운의 시 ‘사랑하는 까닭’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명암의 시 ‘칡넝쿨’과 조영암의 시 ‘출정사’는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작품들이다. 이날도 한 무리의 관광객이 “조명암, 조영암이 누구야. 아는 사람 있어?”라는 말을 흘리며 지나갔다.

건봉사에서 삭발염의한 뒤 만해의 영향 하에서 문인으로 성장한 조명암과 조영암은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신라의 달밤’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선창’ 등 수많은 애창곡의 작사가이기도 한 조명암은 1948년 월북하여 고위직을 지냈다. 반면 금강산 비로봉 아래에서 태어난 조영암은 조명암이 월북한 해에 월남해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비에 새겨진 시 ‘출정사’는 전장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한 작품이다. 전쟁의 불안이 엄습한 가운데 이 두 시비 사이를 거니는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건봉사의 가을은 마냥 슬펐다. 

[불교신문3335호/2017년10월4일자] 

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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