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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17>화성 용주사 종고려 범종 대표 수작으로 국보 가치 충분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7.09.2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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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종 전형 양식 구비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걸작’
제 나이 잃어버린 종 아쉬움 
어느 절서 옮겨온 지 불분명

용주사 고려 범종. 국보 122호이며 높이는 144cm에 이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통일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전기까지의 범종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정착이라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적 경향을 토대로 본 호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고려 전기 범종이 바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에 소장된 국보 범종이다. 

용주사 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종이 광복 이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144cm를 지닌 비교적 큰 외형과 완전한 보존 상태 뿐 아니라 몸체에 큰 글자로 새겨진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명문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록된 명문을 살펴보면 ‘성황산갈양사 범종일구석반 야주성이만오 천근 금상십육년구 월일사문 염거(成皇山葛陽寺 梵鍾一口釋般 若鑄成二萬五 千斤 今上十六年九 月日沙門 廉居)’로, ‘성황산 갈양사 범종으로서 이만오천근을 들여 금상 16년 모월 모일에 사문 염거가 발원하였다’는 어쩌면 범종의 명문으로는 매우 간결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상 16년은 범종의 다른 쪽 몸체에 기록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16년으로서 854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일단 명문을 통해보면 이 종은 통일신라 854년에 염거 스님이 갈양사(葛陽寺)를 창건하고 그 때 이 종도 함께 주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명문은 종의 제작과 관계없는, 그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20세기 초에 추각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의 발원자로 기록된 염거화상의 입적 년대가 20세기 초에 들어와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에 있었던 염거화상의 승탑(국보 140호)은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랜 예로 평가받는데, 이를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金銅塔誌)였다. 이 탑지는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해 승탑을 해체하면서 사라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어 1919년 총독부 박물관에서 다시 구입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주사 범종 삼존상.

특히 가로 17.2cm×세로 28.8cm의 방형 탑지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 중에 ‘회창사연세차갑자계---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 입열반일천팔백사연의(會昌四秊歲次甲子季---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 入涅槃一千八百四秊矣)’라는 구절이 있어 염거화상이 844년에 입적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뒤늦게나마 인정받아 2015년 보물 1871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승탑 내에서 발견된 염거화상 탑지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용주사종의 명문은 염거화상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 종을 발원하여 만들었다는 웃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가장 확실한 통일신라의 승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탑지의 내용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용주사 종의 명문이 왜곡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런 명문을 종 표면에 새기게 된 것일까? 

그 의문은 용주사가 있던 자리가 원래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갈양사(葛陽寺)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조선시대 1790년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圓)의 능사(陵寺)로 건립하였다는 후대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용주사는 정조의 능행, 김홍도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자료를 통해 나름대로 꽤 큰 사세를 떨치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갈양사에 관련된 초창의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용주사는 그 사격을 높이고자 의도적으로 무명의 범종에 ‘갈양사(葛陽寺)’란 사명을 새겨 넣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 이 종이 원래부터 명문이 없었다 치더라도 과연 용주사 종이 통일신라 종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종은 오히려 통일신라 종의 전형 양식을 구비한 가장 전형적인 고려 전기 종으로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용주사 종의 명문.

용주사 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종신은 상원사종과 같은 통일신라 종에 비해 홀쭉해져 세장한 느낌이다. 용뉴는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으나 입 안으로는 보주가 표현되었고 앞, 뒷발로 천판을 누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왼발을 위로 들었다. 용뉴 뒤에 붙은 굵은 음통 부분은 마디를 이루며 서로 맞닿은 앙, 복련문이 아니라 위로부터 원형문과 반원권문, 당초문을 차례로 시문한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특히 천판 위로는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용뉴와 음통을 별도로 주조할 때 생긴 주물 접합선이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음도 독특하다. 상대와 하대는 서로 다른 문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반원권을 번갈아가며 배치한 상대와 달리 하대에는 유려한 줄기로 굴곡진 연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종이 통일신라 종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종신 상부 면에 불, 보살의 삼존상(三尊像)과 비천상을 번갈아 가면서 새긴 점과 4개로 늘어난 당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통일신라 종의 비천상은 833년의 연지사(蓮池寺) 종까지 2구 1조의 주악상을, 다시 통일신라 말까지는 1구의 주악상을 앞, 뒤로 배치한 것이 특징적이다. 여기에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963년에 만들어진 조우렌지(照蓮寺) 종을 시작으로 주악상에서 몸을 옆으로 뉘어 나는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으로 바뀌게 되다가 청녕4년명(1058) 종에서부터 다시 불, 보살상으로 변화되는 양식적 변천을 보인다. 

따라서 용주사종에 보이는 불, 보살의 삼존상과 비천상이 함께 나오는 것은 고려 전기의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당좌는 원형의 연화문 주위를 고사리형의 당초문으로 두른 약간은 도식화된 형태로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아래쪽으로 치우친 하대 바로 위에 배치되었다. 특히 1058년에 제작된 청녕4년명 종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4개의 당좌를 구비하고 있는 점에서 용주사 종은 절대로 통일신라 종이 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국보 140호 염거화상 승탑에서 발견된 탑지의 명문. 가로17.2cm, 세로28.8cm이다.

그리고 통일신라 종의 명문 기록은 성덕대왕 신종을 제외하고 종신 표면에 이처럼 보기 싫게 음각시킨 예는 결코 볼 수 없다. 물론 글씨의 형태도 유려한 통일신라 서체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종 가운데 이 정도의 크기를 지닌 종에 처음부터 명문을 새기지 않은 예가 그리 흔치 않지만 원래부터 명문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 되었는지 용주사 종은 결과적으로 후대에 왜곡된 명문을 새길 수 있었던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용주사 종은 원래의 명문이 없더라도 단정한 외형과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면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국보로 지정받아 전혀 손색이 없는 종이라고 평가된다. 그 제작 시기는 일단 청녕4년명(1058) 종보다 뒤늦으며 새로운 형식의 삼존상이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중반 쯤 제작된 범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여음(餘音)

용주사 종의 명문은 문화재 가치를 파악하는데 있어 남겨진 기록 뿐 아니라 같은 시기의 유물을 비교하여 형식과 양식의 분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미술사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좋은 사례이다. 비록 제 나이를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국보 용주사 종이 지닌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불교신문3335호/2017년10월4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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