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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들을 수 있어야 염불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불교다”포천 동화사 주지 화암스님
  • 이경민 기자 사진=김형주 기자
  • 승인 2017.09.2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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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건강이 나빠져 삼화사 관음암으로 가 1년 동안 관음기도를 올렸다. 초발심을 낸 그곳에서 스님은 삶과 죽음이 결코 둘이 아님을 느꼈다고 한다. 곡절 많은 세월을 지나왔지만 스님 얼굴에선 평온함이 먼저 배어 나왔다.   

‘염불 잘하는 스님’으로 유명세
한때는 삶과 죽음 경계 오고가

염불 ‘하근기 수행’ 인식 안타까워
쉽고 친근한 불교 의례 정착돼야

조용필이 1980년대 대중가요를 주름 잡았다면 당대, 한국 불교 ‘염불왕’은 단연 화암스님이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낮은 목소리에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애잔한 스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복잡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온만이 자리했다. 틀어 놓기만 해도 ‘집착과 잡념이 씻긴다’,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다’해서 스님의 예불·천수경 테이프는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제법 선선해진 바람에 가을이 물씬 풍기던 지난 19일, ‘염불 잘하는 스님’으로 기억 속에 자리한 화암스님을 포천 작은절 동화사에서 만났다.

“봉은사에 있을 때였어요. 한번은 사시불공이 끝나고 독송을 하는데 신도 수백 명이 법당 안으로 얼굴을 빼꼼이 들이밀고 있는 거예요. ‘이 목소리 주인공이 누구인가~’하고 궁금해서 그랬겠지.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염불할 때가 되면 앞에 녹음기가 놓여 져 있대. 그때는 집에 가져가 들으려고 그러나보다 하고 뭐 그냥 넘겼지.”

‘케엑!’하는 기침 소리가 들어간 녹음테이프를 신도들이 돌아가며 수백 번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것을 알고 나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87년 출시된 전설의 앨범 ‘화암스님의 예불 천수경’. 이제는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희귀 앨범이다. 그때부터 ‘염불 잘하는 스님’으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수행자’로서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잘 못나왔거든. 한문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이야 워낙 어렸을 때부터 외웠으니까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어도 그 뜻은 잘 몰랐지. 출가하고 나서 절에서 조금 배우고 혼자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공부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그때서야 조금씩 ‘아 부처님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하고 알겠더라고.”

사명대사, 원효대사가 나오는 위인전을 손때가 까맣게 탈 때까지 읽고 또 읽던 14살, ‘절에 가면 학교 보내준다더라’는 말에 얼른 어머니 손을 잡고 나선 그 길이 운명을 바꿀 줄 몰랐다. 굶기를 밥 먹듯 했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스님만 왔다하면 쌀독에 있는 쌀을 긁어모아 퍼주기 바빴다던 불심 깊은 어머니 뒤를 따라 삼화사로 오르던 그날을, 스님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칠석불공 드리러 간다 길래 전날 밤 촛불을 켜고 좋은 쌀을 골랐지. 글쎄 머리카락이 불에 닿아 ‘지지직’ 소리가 나더라고. 고르고 고른 쌀을 보자기에 정성스레 담았는데 공책이랑 연필도 챙기라는 거야. 영문도 모르고 같이 챙겨 올라갔지. 절에 가니 또래 행자가 하나 있더라고. 그 아이랑 신나게 놀고 있는데 어느 순간 어머니가 사라졌어. 스님이 말 잘 듣고 잘 있으면 어머니가 곧 데리러 올 거라고 하더라고.”

밥 먹으려면 예불을 해야 한다는 소리에 반야심경을 이틀 만에 외웠단다. 또래 행자에게 지기 싫어 천수경도 1주일 만에 머릿속에 넣었다. 절 공부에 재미가 드니 집 생각이 절로 줄었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레 커졌다. 삼화사에서 통도사로, 해인사에 백양사로 큰 절을 찾아다니며 방부를 들였다.

“해인사 일주문 안에 발을 들이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어스름한 새벽 범종 소리가 날 깨우더라고. ‘이제 진짜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쌀이 귀한 시절이라 방부는 쉽게 받아주지 않았어. 겨우겨우 들어가 닥치는 대로 배웠어. ‘초발심자경문’을 그때 알았다니까. 한문이 조금씩 읽히니 그제서야 뜻이 들어오더라고, 내가 매일 앵무새처럼 외우기만 했던 ‘정견이다 뭐다’가 그때부터 그냥 다 이해가 되는 거야.”


“알아들을 수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했다. 나부터 먼저 배워야 했다. 각성스님의 능엄경 강의를 들으러 백양사로, 역경사업을 하던 탄허스님 아래 수학하기 위해 개운사로, 배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걸망지고 나섰다. 욕심이 과했을까. 몸이 견뎌내지 못했다. 1984년, 56kg이던 몸무게가 42kg으로 줄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나는 ‘공허병’이라고 불렀지요. 잠을 잘 때도 기도를 할 때도 자꾸 눈앞에 부처님이 보이는 거예요.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불보살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허상만 보나 했지.”

망상을 지우려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기도를 했단다. 사분정근(四分精勤)을 할 때는 “조금만 더 하자, 조금만 더 하자” 하다 보니 저녁예불 때 시작한 염불이 새벽예불까지 이어졌을 정도. 부처님 가피 덕분인지 기도가 끝날 때 즈음엔 어느 정도 건강도 회복됐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 염불 소리가 좀 다르다고들 해요. 목으로만 내는 것은 아니거든. 지금 이 순간 바로 한 생각도 떠나지 말고 염을 해야 해요. 내 몸이 곧 부처님이라 관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다보면 자신도, 타인도 맑아지거든요.”

조계종 염불교육지도위원장이기도 한 화암스님은 염불이 하근기 수행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세태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경고했다. “의례가 사라지면 종교도 사라진다고 보면 됩니다. 염불 아니 불교의례를 홀대하면 안돼요. 염불 하는 스님을 무슨 푸닥거리 하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법문하는 스님만큼 염불하는 스님도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요.”

의례를 보존하고 계승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님이 보다 강조한 것은 ‘쉽고 친근한’ 불교다. “스님부터 제대로 배워야 해요. 스님들이 독송 많이 할 줄 안다고 그걸 다 100% 이해하는 거 아니거든.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스님들이 제대로 배워서 알아야 해요. 신도들도 그래야 감화가 되죠. 직책을 가진 스님, 법랍이 높은 스님부터 우리말 염불을 실천해야 해요.”

스님에게 불국토는 불자들이 365일 콧노래처럼 ‘부처님~’을 부르는 세상이다. 구색 맞추기, 홀로 아리랑이 아닌 스스로 좋고 신나서,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마음을 다해 부처님을 부르는 것이 염불이고, 그 한 생각이 결국 신심으로 이어진다고 화암스님은 말한다. 

화암스님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처럼 불교의례가 제대로 전승될 때 한국 불교도 살아 숨쉰다”며 “불교는 시대에 맞는 언어로 누군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 온 뒤 땅이 굳고, 바닥을 칠수록 더 높이 솟아오르는 법. “종단이 부르면 때 될 때마다 도와주고 아닌 날에는 작은 사찰 가꾸는 재미로 산다”던 화암스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평온해 보였던 까닭이다.

■ 화암스님은...

1968년 삼화사에서 성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1년 월정사에서 성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75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그 해 백양사 승가대에서 대강백 각성스님을 모시고 공부했다. 이후 해인사, 봉정암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수행했으며 조계종 포교연수국장, 포교연구실장, 의례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 조계종 염불교육지도위원장으로 불교의례 보존 및 계승과 한글화 등을 위한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경민 기자 사진=김형주 기자  ky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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