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가장 간절한 것을
끊는 그것입니다.”
은엽이 용성을 쳐다보았다.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교계는 백용성 한용운이
동지로서 기획에 참여했고
기독교는 이승훈을 설득해
길선주 신흥식을 끌어들였다.  

헌병경찰제 캐치프레이즈인 ‘때려잡자, 반일분자!’는 그냥 흘러가는 구호가 아니었다.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일본 왕의 성지를 받들어 의병(匪徒)을 초멸(剿滅)하고, 귀순하는 의병은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 의병을 나포하거나 그들의 소재를 밀고하는 사람은 상금을 뻥 나가떨어지게 준다는 것, 이러한 유인책 뒤에는 으레 의병을 숨기거나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의병이 사는 마을로 찾아가 마을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읍면까지 없애 버렸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 가진 자는 강한 자에게 그들의 최고 수완인 아첨밖에 할 짓이 없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먼저 나가 싸워 목숨을 바친 본보기(F, noblesse oblige)를 보여주지 못했던 조선왕조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민들레 씨앗처럼 곳곳에 숨어 있다가 일본놈 세상이 되니 경쟁하듯 친일로 돌아섰다. 이왕이면 과붓집 머슴살이하듯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으려고 일본놈 ‘따까리’를 자처하는 부류도 생겨났다. 그래서 친일은 가진 자로부터 시작되었고, 가진 자로서 엇나간 자(F, canaille)는 일본 권력의 사냥개가 되었다. 이런 시국에 독립이 어디 쉬운 일인가.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오세창이 그렇게 찾으려 했던 한용운이 봉익동으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돌을 보면 어디로 구를지 훤히 보이듯, 승려들은 자기들끼리 정보가 번갯불 같아 눈으로 보지 않고도 마음에 둔 사람의 동선이 환했다.

두 사람은 절집 예절로 인사가 끝나자 다탁을 마주 놓고 앉았다.

“오세창씨는 만나봤소?”

“대한민보 사장을 지낸 분 말입니까?”

용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용운수좌를 꼭 만나보라 했소.”

“천도교에서 무슨 일을 꾸민다던데, 오세창 그 사람인가요?”

용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총기 있는 사람이라 척하면 울 너머 호박 뒹구는 소리라는 듯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기밀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다. 

“한용운이 누굽니까? 조선이 제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허허허, 그건 그려…, 천도교에서 대한독립 판을 벌일 모양이드만….”

“그거 섣불리 건드리면 안 건드리는 것만 못할 텐데 자기들끼리 될까요?”

“그래서 내가 용운수좌를 만나보라고 한 거 아니오.”

“그렇다면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한용운이 나간 뒤 대각교당을 맡아 지켜온 시자가 들어왔다.

“귀부인 보살님께서 오셨습니다.”

“귀부인 보살이라니?”

“전에 위창선생과 함께 만나셨던 보살님 있잖습니까?”

위창 오세창과 함께 만난 보살이라면 경성의전 교수라는 그 여자다. 시자가 다음 말을 이었다.

“스님께서 북청으로 가신 뒤 여러 차례 오셨지요. 스님은 지금 멀리 가 계신데, 오시면 연락드리겠다고 했더니, 소식을 듣고 오신 것 같습니다.”

“들어오시라 해라.”

은엽이 방으로 들어와 예전과 달리 무릎을 꿇고 다탁 너머에 앉았다.

“멀리 가 계신다는 말 들었습니다. 건강은 괜찮습니까?”

직업이 의사라 건강부터 물었다.

“덕분에 괜찮소.”

잠시 차를 우리느라 침묵이 흐른 뒤, 우려낸 차를 잔에 따르는 것을 보고 은엽이 물었다.

“지난번 마음을 보았느냐고 묻는 말을 여러 모로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요?”

“마음이 시각과 관계가 있더군요.”

은엽이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이 찻잔 입구를 둥글게 보면 마음이 둥글다는 걸압니다.”

“그럼 하나 물읍시다. 지금 나를 찾아오셨는데, 왜 찾아오셨습니까?”

“생각을 하고 찾아 왔습니다.”

“그럼 생각이 마음이겠네?”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눈으로 이 찻잔 입구가 둥근 것을 보고 둥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듯 말예요.”

“두꺼비는 파리가 움직이는 것을 속속들이 압니다. 사람도 파리가 움직이는 것을 두꺼비처럼 압니까?”

“생각은 많은 단계를 거쳐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잘라 말할 수 없겠지요.”

“느낌이 의식보다 앞서 판단과 분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같은데, 거기에 왜곡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

은엽이 대답을 못했다.

“왜곡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정교하게 말하면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인식이 한 가운데 있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닐까요?”

은엽이 포착하기 어려울 만큼 고개만 끄덕였다.

“가령 보살님은 의학을 공부했으니, 눈앞에 무슨 일이든 보살님도 모르게 의학적 심상(image)이 먼저 개입 안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엽이 대답했다.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의식 속에 의학적 상식이 이미 누적되어 있으니까요.”

“내가 마음보는 법을 가르쳐드릴까요?”

“가르쳐주세요.”

“지금 보살님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보살님을 되돌아보십시오. 보살님이 지금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알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보살님 마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기까지 무수한 생각들이 되짚어 따라올 것입니다. 아주 먼 옛 생각까지…”

은엽이 용성을 쳐다보았다.

“상규스님은 참으로 차갑고 냉혹하군요.”

은엽의 그 말은 자기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알았다는 대답 같았다. 용성이 말을 이었다.

“이 말은 좀 어려운 것이 되겠으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으로 보아 마음에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면 자기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봄이 오니 풀잎과 나뭇잎이 저절로 푸르구나 하는 뜻이지….”

은엽이 한참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일어섰다.

“가시렵니까?”

“네!”

“어디로 가시렵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가장 간절한 것을 끊는 그것입니다.”

은엽이 용성을 쳐다보았다. 이 중놈이 또 새리새리, 벙거지 시울 만지는 소리로 사람을 보내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용성의 방문을 나섰다. 

한용운이 오세창을 만나려 하는데, 느닷없이 최린이 찾아왔다. 최린도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면 벽 너머 음모가 무엇인지 환히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즈음 프랑스에서 세계 제1차 대전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미국 윌슨(Wilson)이 비밀외교 폐지와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서구에서 민족국가가 성립되고, 중국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학생인 이광수는 조선과 처지가 비슷한 세계 여러 나라의 움직이는 정보를 가지고 경성으로 한상윤을 찾아왔다. 한상윤은 최린의 제자로, 이광수로부터 들은 세계정세에 관한 정보가 전해졌다. 최린은 그 정보를 가지고 오세창, 권동진, 손병희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논의된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광수는 곧 도쿄로 돌아갔고, 오세창, 권동진, 손병희, 최린은 이왕 판을 벌일 바엔 크게 벌이자로 방향을 바꿔, 불교, 기독교, 유림까지 모든 종교를 포함시키기 위한 교섭에 들어갔다. 불교계는 백용성과 한용운이 동지로서 이미 기획에 참여했고, 기독교는 장로파 이승훈(본명, 이인환)을 설득해 길선주와 감리파 신흥식을 끌어들였다. 유림은 접촉해보니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제외시켰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했다. 아첨 좋아하는 유가들이 허세로 고양이 소대가리 안듯 대한제국을 세우기는 했으나, 제 코도 못 닦고 흐지부지 용두사미가 되었다. 그 바람에 황제의 나라가 일본제국 밥이 되어 고종이 북통을 지고 쫓겨나 덕수궁에서 코를 빠치고 지냈다. 67세의 이 못난 황제는 그래도 건강에 이상이 없었는데, 시녀가 건네준 식혜와 차를 마신 지 30분이 채 안 되어 숨을 거뒀다. 

환단사상의 얼이 밴 민족정기가 여린 백성들에게 깊이 박혀 나라를 잃은 비분강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일제가 고종황제의 죽음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했으나, 친일파 아닌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고 불을 끄겠다고 적반하장으로 되돌아온 그 발표가 되레 일본놈들이 시녀를 시켜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되어 급속도로 번졌다. 그 바람에 민심이 극심하게 요동쳤다.

[불교신문3332호/2017년9월23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