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후보한 스님들이 걸어온 길


■ 산문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은 ‘공심(公心)’
[기호 1번] 설정스님이 걸어온 길

설정(雪靖)스님은 전형적인 산중도인의 풍모다. 그러나 출가 이후 63년간의 노정(路程)은 개인의 안락을 위한 은둔과는 거리가 멀다. 아픈 중생과 불안한 세상이 있는 곳엔 항시 스님이 있었다. 위태로운 종단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 달려왔고, 사태가 수습되면 다시 빈손으로 돌아갔다.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운 설정스님은 열네 살에 출가했다. 1954년 아버지의 생신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부처님 앞에 몸을 던졌다. 1955년 혜원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지냈고, 공직에서 물러난 후엔 스님의 법명처럼 차갑고도 깊은 정진으로 운수납자의 지남이 되고 있다.

이(理)와 사(事)에 두루 밝은 면모는 1994년 종단개혁 즈음에 진가를 발휘했다. 개혁회의 법제분과위원장을 맡아 개혁입법을 진두지휘했다.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투명화라는 입법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화하고,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 지정은 종단예산 100억 원 시대를 여는 주춧돌로 이어졌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의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거 때마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산문 밖에서나 안에서나 공심(公心)은 안팎으로 여여(如如)했다. 2009년 덕숭총림 4대 방장으로 추대된 스님은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보듬었다. 덕분에 덕숭총림은 어느 총림보다 상하가 화합하면서 가장 안정적이고 정연한 승가공동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평소 자상함과 인자함이 몸에 밴 스님이지만, 불의 앞에서는 언제나 올곧고 강단졌다. 1980년 10·27 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 법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니 십만 병력을 동원해서 스님들을 잡아넣고 불교를 탄압했다.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1995년 독일에서 열린 윤이상 작곡가 천도재에서 설정스님(가운데)이 추모의 예를 올리고 있다.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일화는 여전히 귀감이다. 1995년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의 49재 추모법회를 봉행했다. 49재를 진행하며 고인의 묘비에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 피어나도 더러운 흙탕물에 묻히지 않는다)’이라는 경구도 써 주었다. 독실한 불자였던 윤이상은 냉전시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남한에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인물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전향 장기수 현안으로 인해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강력했던 때다. 천도재에는 북한에서 온 조문객들도 다수 참석했다. 다들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 낼 때 스님은 표표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가족들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답변이다. 이는 이념과 국경을 뛰어넘는 자비실천의 미담으로 이제껏 회자되고 있다.

종단의 여러 원로 스님들과 함께 광주 망월동 5.18 희생자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는 설정스님(왼쪽에서 세번째).

‘죽을 고비’는 스님을 더 크게 만들었다. 1998년 췌장암에 걸렸다. 전체 혈액의 절반 이상이 몸에서 빠져나갈 만큼 심각했다. 스님은 “내가 다시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며 참회 정진으로 병을 극복했다. 수술을 받고 몸조리를 하면서 기도로 병을 완치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 ‘만약 죽지 않고 살면 반드시 진정한 수행자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일상이다. 스님은 자서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내가 농사를 지어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흐뭇하다. 노동의 의미를 일부러 느끼지 않으려 해도 쾌감이 있다”고 말했다. 조곤조곤한 말투 속에 뼈대가 씹힌다. “사람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용기를 내면 살 길이 열립니다. 저는 덤으로 사는 거니까 죽을 때까지 쉽고 편하게 살지 않을 겁니다.”

 

■ 한국불교 살리는 길은 간화선의 대중화
[기호 2번] 수불스님이 걸어온 길

출가를 후회한 적은 없느냐고 누군가 수불(修弗)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답했다. “단 한 번도 없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좋으니까.”

1953년생인 수불스님은 1975년 금정산 범어사에서 지명(志明)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5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지유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했고, 1977년 고암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1978년 범어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이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전국의 제방선원을 찾아다녔다.

수불스님은 범어사에서 특이한 체험을 했다. 현재 금정총림 방장으로 있는 지유스님에게서 달마대사의 <혈맥론>을 공부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태어날 때 이미 마음을 가지고 나왔는데 또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큰스님의 답변을 듣고도 싱겁다고 생각해서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하고 당돌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이내 ‘배우는 학인이 이게 무슨 짓인가!’ 생각하는 순간 큰스님이 “저기 문 열어 놓은 데에 바위가 보이지. 어른이 보는 것과 막 태어난 아이가 보는 게…” 하는 설명을 듣다가 찰나지간에 번쩍 하면서 정수리가 쪼개지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2012년 수불스님은 로스앤젤레스 UCLA 대학 찰스영그랜드살롱에서 특강을 했다.

그 길로 걸망을 멨다. 일어나는 망상을 조복 받으려고 4개월 동안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만행을 했다. 범어사로 다시 돌아와 큰스님에게 다시 던진 질문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란 무엇입니까?”였다. 큰스님의 답변은 한 마디였다. “무수(無修)!” 이 순간 수불스님은 다 내려놓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닦되 닦은 바가 없다’는 의미의 수불(修弗)이라는 이름도 ‘무수’에서 유래한 법명이다.

‘간화선 대중화’ 원력으로 부산에서 금정선원을 열었다. 그런데 처음 포교당을 시작해서 간화선 수행을 신도들에게 시켜보았더니 몇 되지 않던 신도들이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쓴 맛을 제대로 맛봤다.

그런 경험으로 시작된 것이 부산 안국선원이다. 간화선 수행 프로그램을 체계화시킨 7박8일 집중수행이 이때 시작됐다. 지금의 안국선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프로그램이 정착되면서부터다. 1989년부터 28년 동안 300여회에 달하는 집중수행을 해왔다. 3만여 불자들이 수불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요즘 뜨는 혜민스님도 그들 중 한명이다. 수불스님은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듯 시행착오와 시련의 연속이었다”며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마음이 부처다, 이것이 정법이고 정도다’ 이렇게 믿고 정진한 결과 좋은 불자님들을 만나 부산과 창원, 서울 등 3곳에 안국선원을 세우고 원력을 펼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20대 시절 탁발을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탁발이 금지됐지만 공부 삼아 나갔다. 어떤 집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마루에 선 채 스님의 발우에 100원짜리 동전을 던졌다. 마치 농구공을 골대에 던지듯 했다. 수불스님은 ‘탁발 나와서 요령을 흔들며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저런 행위를 하게 한 것이구나. 탁발은 이것으로 그만 둬야겠다’하고는 미련 없이 접었다. 상대방에게 또 다른 업을 쌓게 했으며, 그 책임이 스님에게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평생을 간화선과 함께 해 온 수불스님은 오래전부터 느껴온 ‘간화선의 위기’에 적지 않게 고민해왔다. 간화선으로는 더 이상 지혜를 눈뜰 수 없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스님들에게조차 널리 퍼져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간화선 대중화에 그토록 매진해온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지난 2011년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열린 ‘간화선 집중수행’에서 지도하고 있는 수불스님.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해도 절절히 느끼지 못하는 듯 남방불교 수행법과 티베트 수행법, 일본의 수행법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동국대 국제선센터 선원장을 맡게 된 데에는 이런 세태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간화선의 위기로 느낄 정도의 우리 풍토와 달리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동국대를 통해서 한국의 간화선에 주목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수불스님은 수년간 종단 안팎의 의미 있는 불사에 힘을 보태왔다. 그 힘이 닿은 곳은 종단을 비롯한 사찰, 군법당, 종립학교에 이르기까지 두두물물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방대하고 화려하다. 그럼에도 스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며 몸을 낮춘다.

 

■ 첫째도 둘째도 포교… 다음 생에도 포교하겠다
[기호 3번] 혜총스님이 걸어온 길

혜총(慧聰)스님은 1956년 영축총림 통도사로 입산했다. 수행자로서의 ‘61년 인생’을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단연 ‘포교’라고 말할 수 있다. 제35대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 기호 3번으로 입후보한 혜총스님(전 포교원장)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다음, 그 다음 생에도 포교하겠다”고 발원할 만큼 전법과 포교를 일생의 화두로 삼아 매진했다.

전법과 포교에 진력한 혜총스님의 굳건한 의지는 2011년 11월 제5대 조계종 포교원장 퇴임식에서 선연히 드러난다. 스님은 퇴임사에서 “포교원장 소임을 맡으며, ‘처음도 포교, 중간도 포교, 끝도 포교’라는 좌우명을 세우고 그 길에 어긋남이 없는 포교원장이 되려고 간단(間斷)없이 노력했다”며 남은 생도 포교의 현장에서 살아갈 것을 약속했다.

혜총스님은 포교원장 소임을 맡으면서 △포교의 근간인 어린이청소년포교위원회 설립과 중심도량 제도 시행 △ 신도등록과 신도증 발급사업을 전면 개편한 멤버십 신도증 사업과 신도조직화의 기본 토대인 신도품계제도 시행 △지역·계층별 전법단 구성 등 굵직한 사업 등을 진두지휘했다. 현재는 조계종 총본산 성역화 불사추진위원회 상임부위원장을 맡으며 종단 발전을 위한 마지막 회향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2016년 혜총스님을 비롯한 진구연합회 소속 스님들이 교계기자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모습.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베풀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언행일치의 삶’을 화두로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이사장, 용호종합사회복지관장, 부산불교사회복지기관협의회장 등을 역임하며 40여 년 간 지역사회 복지 발전에 힘썼다. 일관된 하심(下心)도 눈에 띈다. 특히 ‘현대 한국불교 율(律) 중흥조’인 자운스님이 입적한 1992년까지 40여 년간 시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운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을 때 40년간 시봉하겠다고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 혜총스님의 성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편 혜총스님은 1956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표충사, 해인사, 동화사, 선암사, 범어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했다. 해인사승가대학, 범어사승가대학,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했다.

2011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퇴임식을 마친 포교원장 혜총스님이 종무원과 신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청사를 떠나고 있다.

제5대 포교원장과 대한불교신문사 발행인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부산 감로사 주지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불교 안팎의 다양한 공적을 인정받아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과 종정 표창,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과 국무총리 표창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감로의 문을 연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예찬>, <아미타부처님을 만난 사람들>,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등의 저서를 냈다. 최근엔 ‘자랑스러운 부산 시민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 종단 소임 두루 거치며 ‘문화’로 대중과 소통
[기호 4번] 원학스님이 걸어온 길

제35대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 입후보한 원학(圓學)스님. 50년 가까이 수행자의 길을 걸어 온 스님의 삶을 압축하는 단어는 ‘화선불이(畵禪不二)’다. 원학스님에게 그림은 곧 수행의 일환이자 스스로를 탁마하고 다스리는 방편이었다. 포교의 수단으로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스님은 화두를 드는 것처럼 붓을 들고 수행과 문인화의 기본정신에 충실해 지난 40여 년 남종화의 맥을 이어왔다.

이와 같은 원학스님의 지론은 문인화를 대하는 입장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평소 스님은 “문인화를 그리는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해서는 안 된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마음을 닦는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과 자연이 합일된 순간 희열감을 느낄 때 붓을 들고 표현하는 것으로 직관력에 의한 수행법인 수행하는 간화선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강조해왔다. 특히 1970년대 청남 오제봉, 효당 최범술, 우계 오우선 선생으로부터 서계와 다도, 남종화를 사사받고, 7회에 걸친 개인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왔다.

지난 2014년 서울 봉은사 유아수계법회 모습.

봉은사 주지 재임 시에는 “스님과 신도가 편안하게 수행과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게 주지의 소임”이라는 원칙하에 “신도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포교”에 앞장서 왔다. 봉은사가 갖고 있는 다양한 불교문화콘텐츠를 활용한 수행과 신행활동 강화에 기여했다. 불교음악 진흥을 위한 불교음악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봉은사에 불교음악원을 설립해 불교음악의 전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밑바탕을 다졌다.

문인화와 불교음악 등 문화를 통해 포교 활성화에 대한 스님의 남다른 안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불교중앙박물관장 소임 당시에는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를 조명하는 기획전 ‘조계사 창건역사와 유물’ 열어 1938년 조계사 대웅전 건립 당시 불교 상황과 생활사를 보여주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한편 원학스님은 파계사에서 도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5년 파계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1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해인사 선원과 대흥사 동국선원 등 안거 수행했다.

봉은사 주지 취임식 모습.

총무원 총무부장과 문화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불교중앙박물관장, 제10·11·12·15대 중앙종회의원 등 종단 주요 소임을 두루 거쳤다. 해인승가대총동문회장, 문화재청 사적분과 문화재위원, 서울 봉국사, 대구 용연사, 서울 조계사, 서울 봉은사, 군위 인각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총무부장 재직 당시 “총무원 소임은 봉사하는 자리. 즉 머슴살이와 같은데 귀 밝은 머슴이 되기 위해서는 귀가 세 개쯤 있어야 한다”며 ‘삼이(三耳)’란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저서로는 <금강경 야부송> 번역 해설,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 등이 있다.

장영섭 박봉영 엄태규 홍다영 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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