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목 사이 극락전에 아미타불 미소 벙글어지네

태백산맥 천등산 넉넉한 품에 
국내최고 목조건물 극락전 위치 
경내는 상서로운 봉황 기운 가득 
영국 여왕도 감탄한 누각 만세루
천년고목 곳곳에서 사찰 호위 

봉정사 극락전 뒤편 삼성각 느티나무에서 바라다 본 극락전 정면과 대웅전 벽면으로 소박한 천년고찰의 모습이 느껴진다.

해가 천등산 봉정사 어깨에 기댄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린 뒤 내려오는 산바람이 제법 서늘해진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으로 불렀다. 신라 문무왕 이전의 일이다. 의상스님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대망산 바위굴에서 수행을 하던 중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히 비췄다. 그 인연으로 이 바위굴은 천등굴로 불렀고, 대망산도 천등산(天燈山)으로 불렀다. 수행을 열심히 한 능인스님의 도력은 나날이 커져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리니 봉황이 머물렀다. 문무왕 12년(672)에 산문을 열어 봉황(鳳)이 머무르는 정자(停)라는 의미를 담아 봉정사로 이름지었다. 

봉황이 깃들법한 봉정사 입구는 어른 몸통만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방문객을 외호하고 있다. 일주문 사이로 보이는 녹음은 연한 단풍기운을 머금고 있다. 이제 곧 천등산 곳곳에 노란 국화꽃이 앞 다퉈 피어나며 가을이 왔음을 알리리라. 

대웅전에서 바라다본 만세루 모습. 영국 여왕이 방문해 둘러본 건물이다.

일주문 옆으로는 등산길이 나 있다. 어느 기업체에서 배려해 준 등산용 지팡이가 도열하듯 꽃혀 있다. 한여름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이 길을 오르내린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은 숲에 안기고 숲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해 준다. 숲과 사람은 지구가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한 운명공동체였기에 함께 하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봉정사에 대한 추억이 새록하다. 기자 6년차였던 1999년 4월21일로 기억한다.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2세가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늦게나마 취재를 하기 위해 안동에 급파됐다. 

이미 국가원수급 경호가 되어 있는 봉정사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특급경호가 있게 되면 언론사는 공동취재단을 꾸려 사진기자와 펜기자(취재기자) 소수가 근접취재를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조계종 기관지라는 특혜 아닌 특혜를 받아 만세루 옆에서 이동권 없이 ‘말뚝(제 자리서 서 있는 것)’ 취재권을 얻었다. 

봉정사 입구에서 올려다본 만세루 모습.

당시 영국 여왕의 주문은 “가장 한국적인 건물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봉정사가 선택됐다.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있는 사찰이기 때문에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여왕은 만세루에 올라 법고를 둘러보며 연신 “원더풀!”이라는 탄성을 쏟아냈다. 몰록 생각이 들었던 글귀는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구나”였다. 우리 것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서구문명에 의해 쇠락해지고, 젊은이들이 국적도 없는 외세문화에 물들어 있는 현 세태에 깊이 성찰을 해 보아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은 남루해지기도 하고 닳아 허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남루함과 허름함 속에 담고 있는 소중한 정신과 역사적 경험의 무형유산은 금은보화보다도 더 소중하다. 그것을 찾아내 계승해야 오랜 역사를 가진 지혜로운 민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여왕이 슬쩍 다녀간 행사가 많은 시사점과 긴 여운을 남겼다. 

일주문을 지나 언덕길을 오른다. 널직한 공간에 대형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경내를 안내하는 전각이 서 있다. 천년고찰답게 입구부터 보호수인 소나무가 고개 숙이듯 서서 방문객을 맞이한다. 안동 사투리로 “객지에 계시다가 인제 오니껴? 고생하셨니더.”하고 인사를 하는 듯하다.

우측 ‘영산암’이라는 안내판을 뒤로하고 좌측 대웅전으로 향한다. 봉정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흔치 않는 국보건물이다. 현존하는 다포계(多包系)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1962년 건물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할 당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볼 때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한다.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2009년 보물에서 국보 제311호로 승격됐다. 

대웅전에는 조선시대 억불(抑佛)흔적도 있었다. 1990년대 말 벽체를 보수하는 과정에 뜯어낸 자리에 민화를 그린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림들의 횡포가 사찰에 끼친 증거다. 불교를 업신여겨 스님을 홀대하던 시기에 일어났을법한 일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이기에 탱화를 보존하기 위해 걷어낸 자리에서 후불벽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국보급 건물로 보존되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전각이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매표소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소나무 숲길.

대웅전 앞은 여느 사찰과 다르게 툇마루가 깔려 있어 정감이 간다. 출입도 툇마루를 거쳐야 한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밖을 보니 만세루와 어우러진 천등산 전경이 일품이다. 

대웅전을 나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화엄강당을 돌아서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이다. 작고 아담하게 ‘부끄러워 숨어있는 듯’ 자리하고 있다. 국보 제15호로 보존되고 있다. 말끔하게 보수를 해서 오래된 건물같지 않다. 하지만 극락전 앞에 서 보니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오래된 과거’의 모습이 서린다. 

극락전 오른쪽에는 요사로 사용하는 고금당이 있다. 역시 극락전과 크기가 비슷해 아담하다. 고금당 뒤편 언덕에 삼성각이 앉아 있다. 오르는 길은 고불고불한 오솔길. 사람 한명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다. 굽어 오르는 길 위에 천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몇 아름은 족히 넘을 크기가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느티나무 사이로 고금당 뒤편 기왓골이 늘어져 있다. 그 앞에 극락전이 눈에 들어온다. 저녁 햇살이 서녘으로 기울며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대웅전 벽을 비추고 극락전 현판을 비추니 명암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극락전 안 아미타부처님이 앞마당 석탑에 비스듬히 몸을 숨기며 수줍게 미소 짓는다.

‘오랜 세월동안 지켜 온 비결이 수줍음과 은둔과 하심(下心)이었던가?’

뉘엿뉘엿 해가 기운다. 회향하는 발길을 서두르며 극락전 앞마당을 지나다가 만세루 앞에서 발길이 멈춰진다. 예전 엘리자베스 여왕을 취재하기 위해 섰던 자리다. 곱게 늙은 할머니같은 여왕이 미소 지으며 만세루에 올라 법고를 올려다보는 환영(幻影)이 어른거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만세루 문틈 옆 풀숲에서 꽃무릇 몇송이가 붉디 붉은 꽃대를 올려 가을을 알린다.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영산암 내부 풍경.

영산암을 향해 서두른다. 영화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과 ‘동승’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전형적인 한옥정원을 품었다. 대문을 열어 암자에 들어간 뒤 문을 닫으니 겨울철 추운 앞가슴을 열었다 닫은 듯 훈훈하다. 절기상 가을이 된 지 한참이지만 여름 습기를 머금은 암자는 한창 보수중이다. 주지 스님이 직접 암자의 낡은 곳을 보살피는듯 인부들과 열심히 소통을 하고 있다. 천등산에 어둠이 내린다.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수행자의 깨달음을 밝히고, 봉황이 머무르는 상서로운 기운(瑞氣)이 경내에 가득하다. 이곳에 서 있는 인연으로 확실한 가피가 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불교신문3331호/2017년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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