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섭 作 '관음상'.

“내게 있어 거꾸로 땅을 파들어 간다는 것, 즉 ‘발굴 기법’이란 정확하게 대상을 바라보고 만들려는 보편적 인식을 배제한, 조각 지식에 대한 이탈 행위로부터 시작한 또 다른 방법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재료를 깎아 형상을 만드는 방법 대신 거푸집을 만들어 재료를 부은 후 굳으면 발굴하듯 작품을 캐내는 방식으로 조각의 상식을 뒤집어온 ‘발굴’ 조각가 이영섭. 그의 ‘흙에서 나온 세월, 亞’展이 서울 갤러리 마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이영섭은 삼존불’, ‘불상’, ‘어린왕자’, ‘소녀’, ‘설날’ 등 총 31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모두 흙과 시멘트 등을 버무려 묻은 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꺼내는 ‘발굴 기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다소 거칠더라도 최소한의 손질만을 거쳐 흙이 주는 부드럽고 우아한 질감을 표현해 내는 그의 작품은 시간성과 역사성 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 미인 음유와 여백, 소박함 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서구화된 미술 교육에서 벗어나 한국 전통 조각에 대해 연구해온 작가는 1998년 고향인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에서 유물 발굴 현장을 지켜보던 중 ‘출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발굴 현장을 지켜보며 “찬란했던 문화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멸됐다 천년 뒤 땅밖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며 ‘절대성’에 대한 참담함을 느끼게 됐다”는 작가는 ‘조각을 잘 하는 사람’보다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밝힌다.

이영섭 作 '부조'.

기존의 흙을 빚어 굽는 테라코타 방식을 전환, 발굴 기법으로 자신만의 색채를 만들어온 이영섭에 대해 이진경 미술평론가는 “돌가루처럼 묻어있는 시간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지나간 시간을 만들어 낸다”며 “과거란 이렇게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라 말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진경 평론가는 이영섭 작품에 대해 “그저 멋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조상(彫像)이었다면, 혹은 그저 통념을 깨는 새로운 종류의 시간 개념일뿐이었다면 그는 단지 탁월한 조각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영섭의 작품에서 소박하고 투박하게 삶을 살 뿐인 인물의 삶, 말 그대로 특별하지 않은 ‘민중’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비인칭의 리얼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것을 발굴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가, 이영섭이 묻고 꺼낸 것을 볼 수 있는 전시다. 오는 10월10일까지.

조각가 이영섭은 1993년 시작, 26년 동안에 12회의 개인전과 150여회에 걸친 크고 작은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해온 중견 작가다.

이영섭 作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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