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같이 빠르게 변모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떠한 경직성도 

발전에 장애가 될 뿐이다

이제 시대는 전통사회적인
문중이나 문도의식 보다는 
불교본연의 해탈의 정신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10대 제자는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아나율, 수보리, 부루나, 가전연, 우바리, 나후라, 아난이다. 명칭부터 10대 제자이니, 으레 이분들은 붓다의 직계 제자이려니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중 나후라와 아난은 사실 붓다의 제자가 아닌 손제자이다.

나후라의 스승은 사리불이며, 아난의 스승은 녹야원의 5비구 중 한 분인 십력가섭이다. 나후라와 아난이 손제자가 되는 것은 이 분들이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후라는 붓다보다 29〜35세 연하이며, 아난은 24〜27세가 적다. 붓다는 너무 어린 사람이 선배가 될 경우에는 후배로 들어오는 분들에게 부담이 되므로 이들을 손제자를 삼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분들이 10대 제자에 편입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붓다의 회상에서는 ‘누구에게 출가했냐?’ 또는 ‘누구의 제자냐?’ 보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했느냐?’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선천적인 신분과 같은 모든 계급차별을 거부한다.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결과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붓다께서 제창하신 불교의 관점인 것이다. 실제로 불교의 삭발전통 역시 외적인 계급차별에 대한 부정이 존재한다. 과거 우리는 신분의 높낮이를 갓과 같은 모자를 통해서 구분했지만, 인도에서는 신분이 높을수록 상투를 높게 트는 풍습이 있다. 즉 삭발에는 상투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분차별을 무력화시키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해서는 유교적인 문중의식에 물들게 된다. 문중의식은 동아시아만의 조상숭배 문화를 배경으로 조상공동체 안에서 혈연을 통한 유대감의 결속을 의미한다. 즉 혈연·지연·학연의 3연 중 가장 강력하다는 혈연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문중인 것이다.

출가는 혈연을 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 안에는 원칙적으로 문중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유교적인 영향에 의해서 동일한 스승을 모시는 승려들이 문중과 유사한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즉 불교의 문중은 혈연이 아닌 학맥에 의한 문도 즉 제자들의 모임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지역적인 폐쇄성과 선지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맥이나 학통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많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다중으로 접하며 공부하는 시대이다. 즉 우리는 제한된 정보시대가 아닌 개방된 정보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중의식은 이제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항차 이러한 문중의식이 현대 한국불교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인공적인 댐처럼 벽의 역할을 한다면 더욱 그렇다.

출가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길이며, 불교는 이들 승려들이 모인 거칠 것 없는 무한한 노력의 세계여야만 한다. 이것이 붓다께서 천명하신 불교의 쉼 없는 연기의 역동성이다. 그런데 유교의 병폐는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을 고착화시키는 문중이라는 굴레를 씌워 놓았다. 현대와 같이 빠르게 변모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떠한 경직성도 발전에 장애가 될 뿐이다. 이제 시대는 전통사회적인 문중이나 문도의식 보다는 불교본연의 해탈의 정신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3330호/2017년9월16일자] 

자현스님 논설위원·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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