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경 복원사업은 

찬란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림은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할 관광자원을 갖게 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3박4일 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바라본 차창밖엔 태풍 사라가 할퀴고 간 흔적이 처참했다. 경주역에서 내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오릉과 봉황대(지금의 대릉원지구)였다. 즐비하게 늘어선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들 사이사이에 하얗게 피어 나부끼는 망초 꽃들이 소복 입은 귀신처럼 괴기스러웠다. 

을씨년스런 그곳을 떠나 첨성대로 갔다. 선생님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세운 천문대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하셨지만 생각보다는 자그마한 키에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진 모습이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첨성대를 뒤로하고 아픈 다리를 끌며 찾아간 곳은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이다. 그곳엔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타원형 도랑인 포석정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침통한 어조로 이곳에서 경애왕이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하셨다. 이곳 역시 유쾌한 곳이 아니었다.

계림을 떠나 반월성으로 갔다. 그곳에 가면 역사 시간에 배운 찬란했던 신라의 모습이 남아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신라의 궁성엔 궁궐이 없었다. 폐허가 된 성안에 남아있는 건 석빙고뿐이었다. 아아, 그 허전함과 실망감! 반월성을 나와 안압지(동궁과 월지)로 갔다. 우리 동네 저수지보다 작은 안압지 주변엔 쑥부쟁이가 무성했다. 

실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황룡사지로 갔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고 웅장했다던 목탑의 자리는 흔적이 없었고, 망초로 뒤덮인 절터는 묵밭 같았다. 분황사 9층 규모의 모전석탑도 무너져 달랑 3층만 남아있었다. 

불국사로 갔다. 절을 둘러싼 회랑은 사라지고 석축도 태풍 사라에 일부 무너졌지만 청운교와 백운교, 자하문, 석가탑과 다보탑, 연화교와 칠보교, 안양문은 용케 남아있어서 대체적인 골격은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 경내에 불국사호텔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석굴암이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불국사 뒤편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무척 힘들었다. 석굴암에 도착해 금강역사와 맞닥트렸을 때의 경외감과 석굴암대불의 미소를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동시에 살이 떨어져 나가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퇴락해가는 석굴암 모습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신라왕경(新羅王京)인 경주 수학여행에서 받은 느낌은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에 대한 감동이 아니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들과 폐허로 방치된 유적들에서 괴기스러움과 황량함을 느꼈을 뿐이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신라왕경의 모습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가. 보릿고개란 말이 있던 그 가난하던 시절을 지나 세계10대 경제대국이 된 지금 우리는 찬란했던 우리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치욕스런 역사도 바로잡지 못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도 선양하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나라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겠는가. 

신라왕경의 복원사업은 찬란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림은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할 관광자원을 갖게 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모쪼록 국회의원 181명이 ‘신라왕경특별법’을 발의하였으니 이 법을 꼭 제정해 멸실된 이후 몇 백 년 동안 방치된 신라의 궁궐과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한 핵심유적들이 조속히 복원되길 바란다.

[불교신문3328호/2017년9월9일자] 
 

최탁환 논설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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