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버리는 수행하면 반야지혜 옵니다”

작고 초라한 읍소재지, 평택
다 스러져가는 무허가 인법당
학생회 청년회…베푸는 불교

수행·포교·사회복지 ‘모범도량’
스님 원력 신도 보살행 ‘한몸’
용성스님 유훈 실천에 최선다해

1966년 평택 명법사에 걸망을 푼 화정스님. 반백년 세월을 명법사에 오롯이 바친 스님은 지금도 수행과 전법, 포교와 복지에 집중하느라 새벽4시에 하루를 마감한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1977년 일이다.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을 지낸 원담스님은 스물일곱 비구니 화정스님에게 선지(禪志)를 보였다. 큰스님은 화정스님의 화답을 반기더니 “보림(保任)되었다”며 전게송 내릴 법상을 준비하라고 했다. 화정스님은 웃으며 거절했다. “큰스님, 전게송 해서 무엇 하시려고 합니까? 그 게송이 슬피 우는 여인의 눈물 닦아주는 손수건은 됩니까? 아니 배고픈 사람 라면 한그릇만 합니까? 이 세상에 등록금 못내는 애비 마음에 등록금이 됩니까?” 

지난 16일 만난 평택 명법사 회주 화정스님은 40년 전 ‘그 날’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했다. 어디 그 날 뿐이랴. 1966년 명법사서 삭발염의를 하고 반백년 세월 동안 수행과 포교, 전법과 사회복지를 넘나들면서 지금까지도 팔 걷어부치고 발벗고 나서며 쉼없이 세상과 소통해온 스님이다.

스님 출가이야기다. “그때가 열다섯인가? 친한 친구한테 ‘나 이제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려 한다’고 했더니 친구가 너무나 서럽게 울더군요. 왜 그리 우냐고 물었더니, ‘너는 말하는대로 행동하니까, 정말 절에 가서 살 것 아니냐’며.” 언행일치를 중시했고 언행일치의 어긋남을 못견뎌 했던 스님 성향은 어린시절에도 그대로였다. 나름대로 출가사찰을 정한 뒤 고향땅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만난 한 스님에 이끌려 따라간 곳이 평택 명법사다. 

“절은 작고 초라했지만 스님들께서 수행하시는 모습은 거룩해 보였어요. 명법사에서 첫 하룻밤의 시간은 어린 내 마음에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죠. 마치 부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만 같은. 사흘째 되는 날 삭발하겠냐 해서 남쪽을 향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뒤 삭발을 했습니다.”

출가하고도 삶은 순탄치 않았다. 스님 표현대로 ‘언행일치로 살고싶은 바람의 대가’였다. 우여곡절끝에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어떻게 죽어야 시신까지 내가 정리할 수 있나?’ 고민하다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무거운 인생, 통하지 않는 이 세상, 무늬만의 수행자, 자기 허물은 모르고 남의 탓만 하는 사람들…. 이제 나의 죽음으로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고 시원했어요. 병원에 도착해서 내과진료를 신청한 뒤 장기 전체를 기증하겠다고 했죠. 의사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상당히 불쾌해하며 정신과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어차피 죽지도 못하게 됐으니, 스님은 이제 세상을 스스로 뒤집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상을 뒤집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뒤집자. 이제 홀로 서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으리라.” 스님은 원력을 세웠다. 

1970년 7월, 공주 동학사 강원(승가대학) 사집반 졸업여행차 경주 분황사에 갔었다. 때로는 아버지 같이 지금도 화정스님이 깍듯이 모시는 도문스님을 친견한 첫 인연이다. 화정스님은 “도문스님을 친견하고 이 세상에도 중생을 제도하는 큰스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했다. 

“세상이 오염되어 고통의 늪에 빠져서 선한 이들이 악취에 시달려 살수 없는 현실, 거짓을 진실로 포장한 후 말로만 모두를 위한다는 사회성에 견딜 수 없어 죽음을 마음먹었지만 그 일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작은 키에 배운 것도 없는 나 혼자라도 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하는 전쟁터에서, 도문 큰스님과의 만남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지요.”

화정스님의 수행·전법·포교사는 이때부터 ‘롤러코스터’다. 신속하고 정확하면서도 경이롭고 환희롭게 한량없이 펼쳐졌다. 우선 학생회법회와 어린이법회를 필두로 대승불교의 씨앗을 심었다. 법회에 쓸 피아노 한 대도 없어서 스님은 용감하게 찬불가를 한 소절 부른 후 따라 부르게 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포교, 받는 불교에서 베푸는 불교로 변화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남만큼 똑같이 기본으로 목탁치고 받는 불교만 즐겨서는 안된다는 것. 베푸는 불교를 하지 않고는 이 시대 불교가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방향을 잡아나갔습니다. ‘이상한 중’이라며 몰아내야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오늘까지도 고운 시선만 받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하지 않아요.” 

스님은 신도회를 성격별로 나누어 조를 편성하고, 부처님 말씀을 대중화하기 위해 경전이름을 조명으로 사용했다. 경로위안잔치를 열어 불교의 효사상을 전하고 합창단을 모집하는 등 젊은 불자들의 신행을 돕는 포교의 산실로, 명법사는 변신을 거듭했다. 대승불교의 주춧돌을 여법하게 세워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원과 정진은 계속됐다. 1995년 여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구호활동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법사의 ‘전설’이다. 

“우리 불교는 수행정진 점수는 100점인데, 사회포교나 사회봉사 방면으로는 미흡해서 재난발생에 대한 기금모금은 늘상 지각생입니다. 하지만 명법사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미리 준비를 해둔 덕분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예치된 복지기금으로 날마다 배추김치 100포기를 담그고 쇠고기 100근과 좋은 반찬을 보시할 수 있었습니다. 자원봉사자와 함께 현장에 현수막을 내걸고 거사회 청년회는 가스통을 매고 지하 매몰현장에 내려가고 신도회는 식사준비를 맡았지요. 보현보살 십대원을 수행하는 보리살타 대승의 수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양양 낙산사 화재,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스님과 신도들이 수십대 버스를 나눠 타고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간 ‘전국구 명법사’다. 

스님의 오랜 원력과 신도들의 정성어린 보살행이 한 마음 한뜻이 되어 명법사에는 이제 ‘명법사 사회복지재단’을 주축으로 ‘연꽃동산 어린이집’, ‘아가동산 어린이집’, ‘보리살타 금빛학교 주간보호시설’, ‘행복한 은행’ 등으로 주렁주렁 결실을 맺고 있다. 1980년대부터 쉬지 않고 이어온 ‘평택역 무료급식활동’도 주목할만하다. ‘신도결속을 위한 명법사 공양발원문’이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기반으로 수행하는 ‘삼밀(三密)수행’은 화정스님이 알기쉽게 재구성한 ‘신(新)수행·포교전략’ 중 하나다.

스러져가는 인법당 하나로 위태롭게 법을 잇고 산 명법사가 화정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이른바 ‘이 세상을 위한 불사’로 회향하는 순간, 스님은 다시 독립운동가 ‘용성스님(1864~1940)’을 만났다. 도문스님을 통해서다. ‘백용성 진종조사 유훈십사목’에 깃든 뜻이야말로 대한민국의 행복을 위한 실천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한평생 용성스님의 유훈인 대승불교를 실천해 옮긴 도문스님의 깊은 마음에 손을 잡고 화정스님은 남은 생을 ‘유훈불사 동참’에 걸기로 했다. 만해스님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용성스님의 삶과 사상을 대중에 보다 친숙하게 알리고, 소설이나 평전, 교성곡 등 문화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앞장서는 스님이다. 

유독 동그랗게 반짝이는 화정스님의 두 눈동자는, 칠순을 앞둔 세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고 선명하다. 눈에 힘을 주어 법(法)을 설할 땐 앞에 앉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제압하는가하면, 온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하면 천진동자처럼 해맑아 누구든 무장해제 돼버린다. 스님은 “아침과 저녁, 해와 달도 거스르고 산다”고 했다. 

“저녁취침이 새벽 4시, 잠시 눈감았다 뜨면 오전 9시에요. 10시에 아침을 챙겨먹고 바쁜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움직이지요. 새벽 4~5시쯤 하루일과가 끝나는 일이 10여년 이어졌더니 지금도 대중 스님들과 함께 아침 7시 공양을 하지 못해요. 하하하.” 

1960년대 평택은 작고 초라한 읍소재지였다. 온통 흙길이라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부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동네였다. 다 무너져가는 명법사 인법당은 중앙공원지구에 묶여 개발이 어려웠고 사찰 부지는 문중에 속한 땅인데다 법당은 무허가 건물이어서 불사는커녕 잦은 철거위협에 몸이 달았던 시절이었다. 몇차례 죽었다 살아낸 지독한 고행과 아픔을 담보로 오늘의 명법사는 평택 최고의 전통사찰로 자리매김했다. “힘 없고 가진 것 없어도 욕심 버리는 수행을 하면 반야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화정스님의 확신에 따른 결과다.

화정스님은…  
1950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966년 순형스님을 은사로 평택 명법사에서 출가했다. 1972년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삼선승가대학을 졸업했고 석남사와 내원사 등 전국 선원에서 수선안거했다. 재단법인 명법사사회복지재단 이사장, 평택경찰서 경승위원, 삼선불학승가대학원 운영위원장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불교신문3324호/2017년8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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