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새벽 예불 끝난 뒤 

잠깐 뵐 시간이 있을 겁니다.”

햐—! 백상규라는 방물장수가 

언제 이렇게 하늘하고 

씨름하는 사람이 됐나?

이런 꿈 이야기도 있다.

“할머니 나는 날아갈 수 있어요.”

꿈속에서 할머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랬는데… 

젊은 중이 위아래를 쓱 훑었다. 나이답지 않게 세련된 지성미, 톡 쏠 것 같은 지적 수준 때문인지 대답이 정중했다.

“말씀해 해보시지요.”

“지금 교당 안에서 이야기하신 스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살님, 오늘 처음 오셨습니까?”

보살님이란 지칭이 거슬렸다. 젊은 스님 입장에서야 의당히 ‘교당 안에서 법문하신 대사님’이라 해야 할 것이나 고욤인지 닭똥인지도 모르고 ‘교당 안에서 이야기하신’이라 했으니, 오늘 처음으로 왔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런데 은엽은 ‘보살’이란 말이 생소하고 낯설었다.

“네, 저는 불교를 믿지 않습니다만, 매우 훌륭하시다는 말씀을 듣고 처음 왔습니다.”

젊은 스님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사님은 뵙기가 참 어렵습니다.”

무용(無用), 하찮은 일로 쓸데없이 여자나 만나 히히덕거릴 만큼 한가롭지 않다는 대답 같았다. 은엽은 평소의 프라이드가 톡 쏘려고 했으나 꾹 눌렀다. 저 방물장수 때문에 속을 감추고 일생을 사느라 속이 썩을 만큼 썩었는데, 젊은 스님이야 뭘 알겠어,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엿판대기 엿처럼 착 달라붙었다. 

“저와 너무 가까운 분이라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찌 들으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묘한 느낌이 풍기게끔 싱긋, 너 알지, 그런 눈웃음으로 달려드니 그가 다시 물었다.

“친척 되십니까?”

좀 엉뚱했지만 머리가 휙 돌아가 한 술 더 떴다.

“오빠 됩니다.”

“그럼 남원에서 오셨소?”

“네!”

착착 들어맞자 계속 대문 앞으로 밀려든 신도들을 잠시 제지해 놓고 말했다.

“평일에는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아 만나 뵙기 어렵습니다.”

“그럼 어느 때가 좋습니까?”

“새벽 4시면 아침 예불이 끝나거든요, 예불 끝난 뒤 잠깐 뵐 시간이 있을 겁니다.”

햐—! 백상규라는 방물장수가 언제 이렇게 하늘하고 씨름하는 사람이 됐나?

“알겠습니다.”

은엽은 젊은 스님한테 가볍게 목례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삼촌은 반공실(くうしつ)에 쌓아놓은 지폐와 어음을 여러 망태에 나누어 정리했다. 그리고 총검을 감추어 단단히 무장한 젊은이들을 데려와 화폐가 담긴 망태기를 각기 하나씩 요령껏 몸뚱이에 숨기게 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알지?”

“예!”

“자 주먹을 올리고.”

청년들이 야무지게 쥔 주먹을 어깨높이로 올렸다.

“신출귀몰!” 

“신출귀몰—!”

주먹을 머리 위로 솟구쳐 올리며 복창했다.

“철벽수비!”

“철벽수비—!”

“각개약진!”

“각개약진—!” 

척 보니 하는 짓거리가 하늘을 쓰고 도리질할 듯 기세등등한 것이 훈련깨나 받은 것 같았다.

“좋아 오늘밤 어둠이 내리면 출발한다.”

하나 생김생김은 난봉꾼, 능청이, 막바우, 망나니, 발김장이, 한량, 사냥꾼, 시러배, 등짐장수, 건달, 어깨, 제각각 생기고 싶은 대로 생긴 사람들이었다. 일단은 위장이겠지만 거의가 나무꾼행색으로 시왕전에 끌려가듯 비실비실했다. 밤이 되자 서대문, 창의문, 혜화문으로 패를 지어 빠져나가 북방으로 떠났다.

암만 봐도 그들은 여간해서는 말을 듣지 않는, 거위알을 새알이라고 오기를 부리는 백악산 1번지 박고집 같은 자들로, 특수훈련을 받아 말대가리 같았지만 고단의 무인들이어서 대적할 자가 없는 북방 독립군들이었다.

숙모는 그들이 독립군이란 것을 몰랐다. 삼촌은 며칠에 걸쳐 그들 모두를 내보낸 뒤 하루쯤 쉬었다 겉으로는 팽패리 같으나, 그 역시 무시무시한 고단의 무예에다 절에 가서 새우젓을 얻어먹고도 남을 만큼 머리회전이 빠른 경호원만 데리고 집을 나섰다. 숙모가 또 어디를 가시느냐고 눈물로 삼촌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이봐, 희영 엄마! 고구려 평강공주와 불란서 잔 다르크쯤은 알지 않소. 내가 왜놈들에게 빌붙어 헛기침 하면서 거짓말로 살기를 바라지 않겠지?”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날장구를 치지 마세요.”

“그렇더라도 어디를 가시는지 행선지나 알려줘야 할 것 아니오?”

맞는 말이었다. 하나 거짓말을 ‘낭설’이라고도 하고 ‘대포’라고도 한다. 이럴 때는 순전히 집안사람들을 위해 대포를 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능청스럽게 연극대사처럼 늘어놨다.

“나 평양에 좀 가려고 그러오.”

“평양 어떤 분을 찾아가시우?”

“평양법원에 판사로 있는 한상범이란 사람이 내 친구 분이외다.”

이것이 대포다. 희영 엄마는 한상범이 일본에 협력한 친일인사임을 알 리 없다. 하나 은엽은 알고 있었다. 삼촌이 지난번 심양에서 청년들을 모집해 독립군으로 양성해 맹훈련을 시켰고, 이번에 돈을 한 망태씩 감추어 떠나보낸 젊은이들도 모두 심양에서 온 삼촌 부하들이라는 것까지 눈치로 때려잡아 다 아는 일이었지만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뒷날 문제가 생기면 낭설보다 미리 대포를 쏘아두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독립군 지도자가 친일 판사를 친구로 팔아먹는 것은 숙모를 속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나중에 수사기관 같은 데서 조사를 받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쏜 대포이기 때문에 은엽은 얼굴색 하나 달리하지 않았다.

“그럼 언제 오시우?”

“가봐야 알겠지만 할 일 없으면 곧 돌아오겠소.”

거짓말이었다.

“일찍 못 오시게 되면 연락이라도 주시오.” 

“암! 연락 자주할 테니, 은엽이랑 집안 잘 돌보시오.”

수제비 잘 만든 사람이 국수도 잘 뽑듯 거짓말도 이처럼 필요할 때가 있다. 삼촌은 곧 팽패리 경호원만 달고 대문을 나섰다.

삼촌이 심양으로 떠난 지 몇 달 되었다. 은엽은 세상이 텅텅 비어 있는 꿈을 꾸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주사바늘 찌르는 꿈이라면 모르거니와 대낮에 도깨비에 홀린 듯 뚱딴지같은 꿈이었다. 이것이 요즘 학생들이 자주 쓰는 다이나믹(ダイナミック)한 것인가. 텅 빈 공간에 무엇이 자꾸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공간에 은엽은 없었다. 은엽이 있다면 의식만 있었다. 아! 나는 내 몸뚱이를 잃어버렸구나. 그러고도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넓디넓은 빈 공간이 되어버리고 의식만 있는 것인가? 한데 빈 공간이 번쩍번쩍했다. 자세히 보니 이름을 지어 붙일 수도 없는 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씨앗만 몇 개 든 풍선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부풀어 올랐다 터지지도 않고 사라졌다. 어떤 것은 풍선 속에 수박씨 같은 것이 반디불처럼 꼬리를 그리며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꽃은 없나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공간에 장미꽃이 날아왔다. 빨간 장미 한 송이가 공간을 날아오다 환각처럼 자취도 남기지 않고 없어지면서 생담배 연기 같은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햐! 저 향기, 그 연기에 장미 향기가 그윽했다. 향기라고 하면 라일락이 으뜸이지…, 생각이 떠오르기 바쁘게 자주색 밥풀이 줄래줄래 줄기에 붙은 라일락 꽃가지가 날아오다 두 줄기 푸른 연기로 향기만 남기고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라일락 향기를 음미하는데, 코는 없고 연기만 실오라기처럼 날아올랐다. 다음에는 히아신스, 나팔꽃, 어리연, 바람꽃, 베고니아, 초롱꽃, 절굿대 이런 꽃들의 연기가 번개처럼 번쩍이기도 하고 춤을 추면서 입도 맞추고 몸도 섞으며 황홀이 오르가슴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그것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은엽은 깜짝 놀라 잠을 깼다. 꿈은 예측할 수 없다더니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

이런 꿈 이야기도 있다.

“할머니 나는 날아갈 수 있어요.”

꿈속에서 할머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랬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할머니가 사방을 기웃거리더니, 곧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 내 손녀 좀 찾아주세요.” 징징 짜면서 기도했다.

이것이 꿈이다. 공간이 ‘요동치고, 뻗어나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고 찢어지고, 잦아들고 흔들리면서 모든 일에 참견한다(K. C. Cole).’ 이것이 ‘창조의 근원이다’ 은엽은 꿈속 공간에서 끝없이 펼쳐진 환희와 유희와 사라짐과 서글픔을 느꼈지만 없어져 버린 제 몸뚱이는 찾지 못했다. “아니 내 몸뚱이가 어디로 갔지?” 눈도 없으면서 두리번거리니 공중에서 “그것이 질량이다.” 그랬다.

질량? 꿈을 깨고 생각해보니, 은엽은 자기 몸뚱이가 고유한 역학적 기본량임을 알았고, 없어진 몸뚱이는 우주처럼 확대되어 볼 수가 없었다.

[불교신문3322호/2017년8월19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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