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천화율원서 율학 연찬

경학 참선 율장에 깊은 안목

제자잘못 질책에 앞서 당신이 

먼저 불전에 나서 잘못 ‘참회’ 

종수스님은 원칙주의자라 불릴 만큼 부처님 법을 지니고 따르는데 철저했다. 그런 연유로 세수 46세 법랍 28년 되던 젊은 나이인 1963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위촉됐다.

일우당 종수 대율사(1918~1985, 一愚堂 宗壽 大律師)는 부처님 제자로서 일생동안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철저하게 노력하고 또 그런 노력들을 일상에서 언행으로 드러냄으로써 후학의 귀감이 되고 있는 선지식이다. 

성정이 온화하고 항상 말없이 조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과 냉정함으로 생활했다. 제자가 잘못했을 때에는 말로써 나무라거나 하지 않았다. 제자의 잘못을 질책하기에 앞서 당신이 불전에 나아가 제자의 잘못을 참회했다. 원칙주의자라 불릴 정도로 부처님 법을 지니고 따르는데 철저했다.

종수스님은 1949년 자운스님이 개원한 통도사 천화율원(千華律院)에서 석암, 일타, 지관스님 등과 함께 율학을 연찬했다. 1963년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스님의 율맥을 이어받은 종수스님은 종진스님(해인총림 전계대화상)에게 전수했다. 

종수스님은 세수 46세, 법랍 28년 되던 1963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위촉됐다. 효봉스님이 종정일 때다. 1963년은 비구·대처 분쟁인 정화불사가 일단 마무리되고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듬해다. 당시의 종단사정에서 종수스님의 전계대화상 위촉은 큰 의미를 갖는다. 종수스님을 전계대화상으로 위촉하는데 대해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세수와 법랍을 따진 견해였다. 그러나 이런 이견을 자운스님이 잠재웠다. 종수스님의 계행이 바르고 수행정신이 올곧았기에 별다른 말이 더 나올 수 없었다. 1983년 원로회의 의원에 추대된 것도 스님의 수행이력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종수스님은 1918년 1월27일 경북 의성군 구천면 장국리에서 부친 달성 서씨 공삼, 모친 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노스님이 바랑을 메고 들어 왔다하니 숙세의 연이라 했다. 속명은 경진(敬鎭)이다. 

17세 되던 해 1935년 대구 파계사로 출가하여 벽담(碧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불명은 ‘종수’이며 ‘일우’는 법호이다. 1940년 동화사 동명(東溟)스님 아래에서 강원(승가대학)의 이력을 마쳤다. 이후 종수스님은 대구 동화사 금당의 세존사리탑전에 백일기도를 올렸다. 하루 한 끼의 공양과 장좌불와의 대용맹심으로 기도했다. 기도하는 중에 밤중에 사리탑 꼭대기에서 흰색의 서기가 뿜어 나옴을 보고 대신심이 일어 게송을 읊었다. “해동의 천고에 밝은 달이 강남의 만리 하늘에 비치니 그 맑은 빛이 피차가 없으니 나 이제 제방의 선지를 꿰뚫고 말겠노라(海東千古月 江南萬里天 淸光無彼此 欲斷諸存禪).”

종수스님은 교학을 벗어나 참선수행을 작심하고 길을 떠났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스님을 친견한 스님은 약간의 견처가 있었으나 만공스님이 일러준 말씀에 크게 분발했다. 만공스님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단지 부처될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을 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但知作佛 莫愁佛不解語).” 스님은 이 말에 일생을 멍텅구리로 살지언정 말만 따지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서원했다.

이어 오대산 한암스님을 뵈었다. 한암스님은 “계로 인하여 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하여 혜가 나온다. 아는 것과 행함이 상응해야 출가수행자라 할 수 있다(因戒生定 因定發慧 解行相應 方名爲僧)”고 했다. 종수스님은 이 말을 깊이 새겨 가슴에 담았다.

1942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영명(永明)율사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전국의 선원에서 안거정진했다. 항상 묵언 하에 대중에 수순했다. 1947년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다. 1949년 자운스님이 통도사에 천화율원을 개원하자 이에 참여하여 율장을 탐구했다. 이로써 종수스님은 경학과 참선수행 그리고 율장에 깊은 안목을 두루 갖추었다. 

그러나 스님은 언제나 그러했듯 당신의 수행정진력을 밖으로 드러내 과시하거나 이를 내세워 명리를 좇지 않았다. 1964년 파계사 주지에 취임했다. 이 때 종수스님은 당시 성전암에 주석하던 성철스님을 모시고 파계사에 선원을 차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주지직을 내놓았다. 1968년 해인총림에서 동안거를 지내고 1970년 파계사 주지에 재 취임했다. 1978년 스님이 60세 되던 해 신도와 권속들의 권청(勸請)으로 의성 고운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1983년에는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어느 날 문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고금의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 생각에 이 몸이 환신인줄 안다. 환(幻)인줄 알아 환을 여의면 당당히 본신이 드러남이라(古今大智人 念念知幻身 知幻便離幻 堂堂現本身).” 이어 스님은 “칠십 인간사가 한바탕 봄꿈이니 너희들은 이 이치를 잘 알아 앉고 눕는 행동거지에 뜻을 산과 같이 하라.(七十人間事 一場春夢間 汝曹參此理 坐臥志如山)”하고는 입적했다. 1985년 10월10일(음력)이었다. 세수는 67세요 법랍은 44년이다. 장례는 원로회의장으로 봉행했다.

  ■ 종수스님 ‘중노릇 잘하는 법’      “여자와 돈에 원수지면 된다” 

종수스님이 경전공부 할 때다. 한여름에 방석을 깔고 앉아 경책을 펼쳤다. 삼베바지는 땀이 배었다. 방석을 깔고 앉았다하나 땀이 얼마나 배었는지 삼베바지가 헐어서 삭을 지경이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공부했다. 

스님은 한산시와 천오백찬불송을 좋아해서 늘 곁에 두었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도를 깨쳐라’, ‘성불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중노릇 잘 해라’, ‘넘치지 마라’, ‘처염상정(處染常淨)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는 중이 되면 안 된다. 청정하게 살아라’하고 일러주셨습니다.”

스승의 이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살아온 상좌는 스승의 또 다른 일면을 얘기했다.

스님의 양말이 해어졌다. 목양말이라 잘 해어지곤 했다. 상좌는 깁고 또 기워도 워낙 해어진 거라 더 깁기에도 지치고 짜증났다. 나일론 양말이 부드럽고 모양도 좋고 질긴데 왜 목양말을 고집하시는지 부아가 났다. 어느 날 깁던 양말을 군불 때는 아궁이에 처넣었다. 원주가 나일론 양말을 사 드렸다. 스승은 아무 말 않고 3일 동안을 맨발로 지냈다. 목양말을 사드리니까 그제야 양말을 신었다. 

어느 날 다락을 청소했다. 한 구석에 딱딱하고 뭉툭한 게 먼지가 잔뜩 쌓인 채 놓여있었다. 떡이었다. 놔둔 지 오래되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스승이 다시 찌라고 일렀다. 그 떡을 씻어서 다시 찌니 겉은 물렁해졌으나 속은 야물었다. 상좌는 이 떡을 아예 죽을 만들기로 했다. 솥에 넣고 끓였다. 맛이 영 아니었다. 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또 끓였다. 그래도 맛이 아니어서 ‘에라 버리자’하고 내버렸다. 스승에게 혼이 난건 물론이다. 상좌에게는 아무 말 않고 당신이 법당에 가서 참회의 절을 하니 상좌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상좌는 부처님 앞에 나아가 삼천배를 올리며 참회했다.

도량 마당에 풀을 뽑았다. 스승은 그 풀을 뒷산에 갖다 심으라 했다. 그럴 거면 풀을 왜 뽑으라 하는지 투덜대며 상좌는 시키는 대로 했다. 물까지 주어야 했다. 스승은 “그것이 계(戒)다”라고 했다. “저 풀은 우리보다 앞서 이 도량에 있었다. 여기 주인이다. 주인을 몰아낼 수 있는가.” 스승의 말이었다.

스승을 모시고 서울 도선사에 갈 때의 일이다. 한 밤중에 역에서 내렸다. 그 때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다. 길이 멀어 다음날 가야 했다. 잘 곳을 찾았다. 근처 여관은 만원이었다. 호텔로 가시자니까 비싼 데는 안 간다 했다. 합숙소 같은 곳에 갔다. 한 밤중이라 그 곳엔 거지나 부랑자들이 자러 모였다. 그때서야 스승은 옮기자고 했다. 걸망에 청담스님에게 가져갈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잃어버릴까 걱정된 것이다. 결국 호텔로 가게 됐다. 공양을 하기 전이라 종업원에게 시켰다. 고기는 일체 갖고 오지 말고 국에 새우젓 넣은 것은 파, 마늘 넣은 것도 안되고…. 스승의 말에 종업원을 멀뚱했다. 그러면서 ‘정말 스님 같은 스님이시다’며 존경한다고 했다. 스승이 씻으러 간 사이 밥상이 들어왔다. 계란프라이가 2개 얹혀 있었다. 종업원의 존경의 표시였다. 그걸 상좌는 스승이 나오기 전에 다 먹어버렸다. 이를 안 스승은 상좌에게 화장실에 가서 토해내라 했다. 다음날 도선사 법당에서 스승은 상좌의 잘못을 참회하는 절을 했다. 장삼을 입은 채 스승은 제자 잘못 가르쳤다고 무수히 절을 했다. 상좌는 정말 융통성 없는 스님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스님 어찌하면 중노릇 잘 할 수 있습니까” 상좌가 물었다. 

“여자와 돈에 원수지면 된다.” 

“나태심이 일어날 때는 어찌하면 됩니까?”

“네 깎은 머리를 쓰다듬어 보거라. 네 머리 깎을 때의 그 첫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논설위원

 

도움말 : 종진스님(해인총림 해인사 전계대화상), 법성스님(영덕 법륜사), 회암스님(불화가), 보광스님(거창 성불사), 정각스님(대구 수타사) 

자     료 : 일우당 종수대율사 비문(일타스님 지음)

[불교신문3321호/2017년8월16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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