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호남불교 상황 고찰하는 귀중한 성보

 

광해군 4년 1612년 조성 ‘확인’

복장물 대부분 ‘법화경’ ‘화엄경’

조각승 태전스님 작품으로 유일

불교조각 대흥사 연구자료 중요

해남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동쪽으로는 강진, 서쪽으로는 진도에 인접해 있으며 두륜산에 위치한 신라 말에 창건된 절이다. 이 사찰은 벽화로 유명한 강진 무위사와 땅끝 마을 해남 미황사를 비롯해 영암 도갑사 등 해남 인근의 여러 사찰을 말사로 두고 있다. 대흥사는 대둔사(大芚寺)에서 대흥사(大興寺)로 절 이름을 고쳤는데, 창건 당시는 대둔사였고 조선 후기에는 대흥사(大興寺)로 불렸다. 1993년에 다시 대둔사로 변경했다가 2003년에 대흥사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남의 여러 사찰 가운데 조선 후기 많은 고승을 배출한 곳이 바로 대흥사다. 서산대사로 잘 알려진 청허 휴정(1520~1604) 스님께서 말씀하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를 상징하듯 대흥사에서는 조선 후기 선승을 의미하는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교학을 담당했던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했다. 이 분들이 머물며 선 수행과 경전을 강의하며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던 대흥사가 바로 호남 불교학의 중심지이며, 청허 휴정스님의 정신이 전승되는 곳임을 방증해 준다. 절 입구의 승탑원에는 이분들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어 스승에게서 제자로 법이 전해졌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대흥사가 조선후기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서산대사 때문이었다. 스님께서는 대흥사는 ‘물, 불, 바람으로 인한 세 가지 재앙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宗統)이 이어지는 곳’이라고 해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대흥사에 전하도록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흥사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가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대흥사는 선과 교를 겸비한 선교양종의 큰 사찰로 자리잡았고, 19세기의 대흥사는 초의스님을 비롯한 대흥사 스님들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아울러 정조에 의해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한 표충사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대흥사는 보다 더 중요한 사찰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서산대사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는 대흥사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3년이었다. 대흥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상, 약사여래상, 아미타여래상의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유물 때문이었다. 필자는 사단법인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의 의뢰로 2013년 6월 15일과 28일에서 29일 등 두 차례 걸쳐 복장물을 조사하였는데, 지금까지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대흥사 삼세불상이 광해군 4년인 1612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석가여래가 본존으로 봉안되는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에 중생의 병고를 담당하는 동방 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상과, 죽은 후 왕생을 기원하는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상을 함께 모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세 불상을 ‘석가여래삼불상’이라고 부르는데 본지 2회의 ‘논산 쌍계사 석가여래삼불상’과 8회의 ‘완주 송광사 석가여래삼불상’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불상 발원문에는 ‘삼세불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호부터는 필자 역시 ‘삼세불상’으로 부르고자 하는데 두 용어는 혼용되고 있다. 

대흥사 대웅보전 삼세불상의 크기는 석가여래상은 196.6cm, 약사여래상은 163.7cm, 아미타여래상은 168.3cm로 큰 불상에 속한다. 복장물은 후령통과 발원문을 비롯해 오색 직물, 오곡, 향낭, 그리고 다수의 경전과 다라니가 발견되었다. 석가여래상에서는 <법화경>과 <화엄경소> 및 <화엄경소초> 등 주로 경전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대둔사 13종사와 13강사가 모두 화엄경을 강의하는 법회인 ‘화엄강회(華嚴講會)’로 유명한 이들이며, 13종사는 모두 서산대사의 법맥을 잇고 있으며 화엄경 종사로도 유명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약사여래상 발원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법화경 시주질’을 따로 마련한 점이다. 세 불상의 복장물은 책으로 묶이거나 낱장으로 된 <법화경>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조성기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세불상이 봉안된 대흥사 대웅보전.

약사여래상의 발원문은 말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전체 길이가 무려 2미터가 넘는다(229cm). 앞쪽의 조성 목적을 기록한 부분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아, 슬픈 일이도다. 국운이 불행하여 임진년(1592년) 초부터 왜구가 크게 일어나 적군의 배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와 부산에서 경성까지 국토가 수년 동안 적병으로 가득 찼다. 오직 우리 호남 지역만 다행히 전란에 휩싸이지 않았다. 이전 정유년(1597년) 칠월 보름에 우리 수군이 패한 후 왜적들은 육지와 해안의 백성들을 처참하게 죽였고, 모든 관아, 여염집, 산사 할 것 없이 모두 불에 타고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이후 10여년 간 법당과 여러 당우들이 옛 터에 대부분 복구되었고, 후불도와 시왕도와 불상을 조성했다. 이것을 제대로 고증할 사람들이 없어서 옛 것처럼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운수납자가 성의를 다해 한 해 동안에 불상을 조성했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때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정유재란(1597년) 때 왜군들의 약탈로 황폐화 되었고, 그 후 여러 사람들의 시주로 옛 터에 법당을 복구하고 불화와 불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왕실의 안녕, 온 국토의 평안, 조상들의 극락왕생, 시주자들의 무병장수 및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고 있다. 

발원문 제목이 ‘소성복장기(塑成腹藏記)’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반영하듯 조사 당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은 나무로 윤곽을 만든 후, 표면만 흙으로 마무리한 상태였다. 석가여래상은 표면을 흙으로 마무리하지 않아 아미타여래상 및 약사여래상과는 다른 기법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대흥사 삼세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은 총 10명인데 수조각승은 태전스님이며, 의근, 명묵, 송간, 덕보, 석훈, 석호, 경륜, 애인, 사인 스님 등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다. 수조각승 태전은 1600년에 김제 금산사를 수문대사와 함께 재건하였고, 1615년에는 수조각승으로 금산사 칠성각 독성상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태전스님의 작품은 대흥사 삼세불상이 유일하기 때문에, 그동안 <금산사지>에서만 언급된 수조각승 태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된 점이 중요하다.

대흥사 삼세불상의 시주자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시주자는 윤환이다. 그는 해남 윤씨 가문의 인물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훈련원 봉사(奉事)를 거쳐 수문장으로 재직 중일 때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 선조가 평안도 의주로 피난 갔을 때 임금을 호위했고, 송덕일과 함께 많은 공을 세웠다. 윤환을 중심으로 해남 윤씨 가문이 대흥사 삼세불상 조성의 시주자로 동참하고 있었던 사실은, 17세기 윤씨 가문과 대흥사와의 관계 연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7세기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 뿐만 아니라 대흥사의 역사를 살펴보는데도 삼세불상의 복장 유물은 중요하다. 1823년에 간행된 <대둔사지>는 중관해안(1567~?) 스님께서 1638년에 지은 <죽미기>의 내용에 오류가 많아 이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의 대흥사에 관한 서술은 승군으로 활약했던 중관스님의 기록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깝게 기록되었다. 

예를 들면 1823년의 <대둔사지>에서는 대흥사가 정유재란 때 피해가 없었으며, 청련 원철스님은 대흥사 중건과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1612년의 불상조성기에 의하면 대흥사는 임진왜란 때는 무사했으나 정유재란 때 병화를 입어 불상을 새롭게 조성했고, 청련 원철스님이 불상 조성의 증명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관해안 스님의 기록이 사실에 더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대둔사지>에는 이러한 정황을 알려주는 불사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불상 조성기가 발견됨으로써 대흥사의 17세기 불사 경향을 살피는데 중요한 단서를 찾게 되었다. 대흥사는 조선시대 서산대사와 관련이 깊은 관계로 왜란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불사에 동참했을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왜란 전후 조선 후기 호남 불교계 상황을 고찰하는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교신문3321호/2017년8월16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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