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양식 충실히 계승한 고려 범종 ‘백미’

 

국내 고려종 중 가장 커

한국 범종 연구에 ‘중요’ 

역동감 넘친 용두 ‘눈길’

폐사후 이곳저곳 ‘전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천흥사 종.

한국 범종의 기본 형식인 통일신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그 형태와 의장면에서 다양하게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종의 몸체는 그 외형이 직선화되거나 아래 부분인 종구(鐘口) 쪽으로 가면서 점차 밖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천판의 외연인 상대 위로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라는 돌출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기 시작한다. 이 입상화문대는 고려 12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13세기 이후에 와서는 점차 연화문이나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장식한 꽃잎 형태로 돌출되어 상대와는 별도의 완전한 독립 문양대로 자리 잡게 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입상화문대는 고려 범종의 제작시기를 구분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양식적 특징이 되고 있다.

용뉴는 통일신라 종에 비해 목이 가늘면서도 길어지고 점차 S자형의 굴곡을 이루면서 매우 복잡하게 표현된다. 특히 용의 머리가 종의 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에 따라 용의 입안에 표현되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기도 하는 등 상당히 장식화 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지난 호까지 소개한 10세기 범종이 이러한 새로운 고려 범종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화28년명 천흥사(天興寺) 범종은 외형과 문양면에서 오히려 통일신라 종을 충실히 계승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용뉴의 표현에서 목이 앞으로 들려있거나 세장해진 음통을 제외하고 높이 솟은 연뢰와 당좌의 모습, 특히 앞 시기에 보였던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이 아닌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표현된 것은 통일신라 종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종은 명문이 없었다면 통일신라 후기 종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전통성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 종의 종신에 표현된 위패형(位牌形)의 명문구는 천복(天福) 4년명(904) 우사진구(右佐神宮) 종의 종신에 표현된 방형의 명문곽(銘文廓)을 고려시대에 들어와 새롭게 번안한 요소로써 이후 제작된 고려 시대 범종의 하나의 모본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이 범종은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9세기 중엽의 운천동 출토 통일신라 종 이후 약 2세기 정도의 공백기 이후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고려 종으로 그 가치가 높다. 

용뉴와 음통.

우선 역동감 넘치게 조각된 용두는 그 입을 천판 위에서 떼어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 통일신라 종과 구별된다. 굵고 긴 음통에는 대나무 마디 형태로 구획하여 당초문과 보상화문을 시문하였고 천판 중앙부의 용뉴 주위에는 주물자국이 도드라져 있다. 이 역시 당시 종신과 용뉴 부분을 별도로 조각하여 결합해 주조한 점을 잘 보여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 천판의 외연부를 돌아가며 복엽의 연판문을 촘촘히 시문하여 견대(肩帶)처럼 두른 것은 이미 성덕대왕 신종에서 보이던 요소이지만 보다 도식화된 점을 느낄 수 있다. 상, 하대는 동일한 문양으로 시문하였는데, 그 외연은 연주문 띠로 들렀고 내부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문양면에서는 오히려 통일신라 9~10세기 종에 비해 훨씬 정교한 점이 느껴진다. 

상대 아래 붙은 연곽대에도 동일한 보상당초문이 장식되었고 연곽 안으로는 연화좌 위에 높게 돌기된 9개씩의 연꽃봉우리가 배치되었다. 그러나 일부의 연뢰가 부러져 있거나 그 상단이 심하게 마모되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하부에는 구름 위에서 천의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두 구의 주악상이 표현되었지만 이 부분도 마모가 심하여 정확히 어떤 악기를 표현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두 손을 모아 위로 솟은 악기를 부는 모습과 다른 쪽 주악상은 악기를 손으로 타는 모습처럼 보이는 점에서 상원사종(725)에 보이는 공후()와 생황(笙簧)을 표현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런 주악상의 도상은 통일신라 종 가운데서도 고식의 예를 모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원형의 당좌 역시 통일신라 전성기 종의 당좌를 모방한 듯 중앙의 원형 당좌에는 연과가 돌출되고 그 주위를 볼륨감 있는 8엽의 연판으로 둘렀고 이 주위를 연주문으로 감싼 뒤 외구에 유려한 연당초문을 시문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고적 경향과 달리 한쪽 비천과 당좌 사이의 공간을 택해 위패형(位牌形)으로 만든 명문곽을 별도로 부조시켜 명문을 새긴 점은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명문은 ‘성거산천흥사, 종명, 통화이십팔년경술이월일(聖居山天興寺, 鍾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 이란 비교적 간략한 내용을 양각으로 새겼다. 

비천.

이 종이 있던 성거산 천흥사는 지금의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4길에 있던 절로서 현재도 보물 제99호 천흥사지 당간지주(天興寺址 幢竿支柱)와 보물 제354호 오층석탑(天興寺址 五層石塔)이 남아있다. 성거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6 직산현(稷山縣)과 목천현(木川縣) 산천조(山川條)에 그 지명이 보이는데, 특히 직산현조에는 ‘성거산(聖居山)이 고을 동쪽 21리에 있으며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위에 오색 구름이 있는지라,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고 제사 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컫었다. 우리 태조(太祖)와 세종(世宗)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고려 태조와 연관이 있는 유서 깊은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거산 불우조(佛宇條)에는 천흥사의 기록이 보이지 않아 조선 전기에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명문에 보이는 통화(統和)는 요나라의 연호로서 그 28년은 고려 1010년인 현종(顯宗) 원년(元年)에 해당된다. 따라서 천흥사의 창건은 922년으로 전해지지만 종에 기록된 명문을 통해 1010년경 천흥사에 커다란 불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파악되며 실질적인 창건의 시기가 이 때쯤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천흥사종은 절이 폐사된 뒤 한 동안 경기도 광주(廣州)의 관아에 옮겨졌다가 일제강점기 때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으로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해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와 연대가 가장 앞서는 종인 동시에 통일신라 범종 양식을 아직까지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한국 범종 연구에 매우 중요한 편년 자료이다, 다만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비천상과 연뢰 부분이 많은 마모가 있어 아쉬움을 주지만 그 가치 면에서 국보로 지정받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당좌.

 여음(餘音)

태평(太平)년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요의 연호가 오랜 공백기를 지나 처음 종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천흥사 종의 명문이다. 고려 현종(顯宗) 년간의 실질적인 원년인 1010년에 앞 시기의 고려 종과 달리 통일신라 종을 다시 계승했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복고적 경향을 추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종보다 불과 40여 년 늦게 만들어진 1058년의 청녕(淸寧) 4년명종(1058)에 갑자기 불, 보살상과 당좌가 4개로 늘어나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면서 이제 고려 범종은 본격적인 고려 범종으로 정착을 이루게 된다.  

[불교신문3319호/2017년8월9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