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용성이란 사람 
어릴 적 이름을 
알아달라고 했지. 
그래 알아봤나?”
“네, 남원 하번암에서 사시고, 
그 때 이름이 백상규였답니다.”

백상규라는 말에 은엽은 
귀가 멍하고 울렸다. 
망주석! 그렇지. 
아무 생각도 없이 한순간 
능침공간의 망주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봉익동입니다.” 

한학기가 지나자 동규가 찾아왔다.

“교수님, 학교에 제적원을 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은엽은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작별이 이런 것인가. 헤어지면 그냥 끝나는 것. 매년 졸업생을 떠나보냈지만 더러 눈시울을 적신 적은 있었으나 제적원을 낸 동규의 말에서처럼 이렇게 감정이 회오리를 친 적은 없었다.

방물장수 때문이야, 그 놈의 그림자를 안고 녹두빛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연연히 수놓아 몇 해를 살아왔던가. 은엽은 가까스로 마음을 누르고 곁에 빈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좀 앉게.” 동규가 의자에 앉았다. “자네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려 하지?” 생각해 보면 동규한테 해야 말이 아니었다.

정신없는 노친네 죽은 딸네 집에 가듯 마음이 헷갈려 내뱉는 소리였지만 동규는 그렇게 듣지 않는듯했다.

“죄송합니다. 본과나 마치고 시작하라는 교수님 말씀이 생각나 휴학원을 낼까 하다가 제적원을 쓰면서 저도 손이 떨렸습니다.”

“그래서 한 얘기가 아닐세. 내가 시집을 못 가 그런지 정을 받았던 남자를 떠나보낸 것이 이런 것일까 그렇구먼.”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눈앞에 동규가 번암면 방물장수로 보여 속에 있는 말이 얼결에 튀어나왔던 것인데, 동규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이 무슨 망발인가….

“오해하지 말게,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알거든.”

항우도 낙상할 때가 있고 소진도 망언할 때가 있다더니, 이 또 무슨 소린가, 이런 것을 느닷없이 호박국 끓이자는 소리라 하던가.

“교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다른 정을 주셔서 그럴 거예요.”

“아니야. 전에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지.”

은엽의 생각에도 벌써 번지수가 다른 귀뚜라미 풍류하는 소리였다. 하늘천 하니 하나 건너 뛰어 넘을천 하는 소리 같았다. “난 자네와 아무 약속도 하질 않았네. 왜냐 하면 사람들은 돌아서면 잊혀져 버리거든.” 혼수품이 오가던 시절 방물장수로 변장한 사람이 신랑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회한이 저절로 터져 나온 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모른 동규는 달리 받아들이지 않은듯했다.

“교수님,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네….”

꿈에 넋두리 같은 소리만 자꾸 이어졌다.

“과거는 없는 듯 사라지거든…. 단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을 가려고하는 자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야.”

가까스로 머릿속 방물장수를 지워내고 들려준 말이었다.

“저는 교수님 제잡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렇겠지만 곧 잊게 될 거야.” 동규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출가한다고 그랬었지…. 그래 어디로 갈 겐가?”

“범어사로 갈 겁니다.” “범어사가 어디에 있지?” “부산 동래에 있습니다.”

“멀리 있군…. 큰길은 곧추 뻗어 있으니 자네 갈 길을 가게.” 매정스럽게 들렸든지 동규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방울을 훔쳤다. “일조선전양마조(一條線拴兩螞蚱)라는 말이 있지.

메뚜기 두 마리를 실 하나에 묶어놓을 수 없는 거야.” 은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는 지략도 깊고 사리에 밝아 행실까지 올바르니 큰일을 해낼 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란 건 없고, 장가 세 번 가면 불 끄는 것도 잊는다네. 그런 기분으로 열심히 살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들은 듯 동규는 아무 표정 없이 일어섰다.

은엽이 앞서 연구실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자 동규가 문밖으로 내려서면서 물었다. “교수님 부탁하신 것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참!” 은엽은 생각났다는 듯 문지방을 짚고 동규를 내려다봤다.

“용성이란 사람 어릴 적 이름을 알아달라고 했지. 그래 알아봤나?” “네, 남원 하번암에서 사시고, 그 때 이름이 백상규였답니다.”

백상규라는 말에 은엽은 귀가 멍하고 울렸다. 망주석! 그렇지. 아무 생각도 없이 한순간 능침공간의 망주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돈화문에서 옛 좌포청 내려가는 길 중간, 태묘 쪽에 있습니다. 집은 민가지만 대문에 ‘대각교’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길을 가다 용변을 보던 사람이 몸을 추스르듯 은엽은 마음을 다잡았다.

“거기가 무슨 동인가?” “봉익동입니다.” 새삼스럽게 가슴에서 방망이질이었다. 한참 더운 피로 이성을 그리워하며 살 나이에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망발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은엽은 가까스로 입술에 웃음을 발라 동규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알겠네.” 동규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곧 문을 닫고 돌아서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받치고 의자에 앉았다. 방물장수, 그 작자가 지금 봉익동에 대각교 현판을 걸고 있다 그 말이지. 왜 이렇게 세상이 좁고 만사가 심란한가…. 삼촌이 소문 없이 오셨다. 밤중에 대문을 두드려 문을 여니 허름한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쓴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뉘 뉘시오?”

처음에는 숙모도 은엽도 삼촌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집을 나가 있었더니 다른 옹솥을 들였나?” “아빠—!” 뒤따라 나온 희영이 한눈에 아빠를 알아보고 달려가 안겼다.

그제서야 반 울음으로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팔소매를 붙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는 것을 보니 삼촌은 쭈글쭈글 늙은이가 되어 나타났다. “아니, 당신이 희영이 아빠가 맞소?”

“이 사람, 나 없는 사이에 치매 들렸나?” “어디서 뭘 하셨기에 이렇게 상것이 되어왔소?” 숙모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삼촌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희영이는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가며 삼촌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삼촌의 올이 굵은 회색 두루마기는 때가 새까맣게 절었고, 동정은 아예 검은 헝겊이었다. 삼촌이 곧 두루마기를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 식사가 차려지자 숙모를 바라보았다.

“거, 가양주가 있거든 한 병 가져오구려.”

가양주를 한 잔씩 권하며 식사를 했다. 한데 식사를 하면서도, 물론 식사를 끝내고 응접실 소파로 나앉은 뒤에도 그동안 어디를 돌아다녔으며,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입 밖에 한 마디도 내지 않았다. 결정질 석회암처럼 양반 테가 좔좔 흐른 하얀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뼈마디가 앙상해 중노동을 하다 온 사람 같았다. 집안 식구들이 그 점을 애태우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네 떡 나도 모른다는 식이었다.

“아니, 색시 귀신에 붙들렸수? 몇 년을 밖에 계시다 왔으면서 복 들어온 날 입술 닫듯 왜 그러시우?” 삼촌이 껄껄 웃었다.

“집안에 이리 어진 부인이 있는데, 씨름에 진 사람은 말이 많은 법이외다.”

은엽 역시 입술이 근질거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삼촌, 평양 박태은 선생 댁에 계셨다 오셨지요?” 박태은이란 이름에 눈빛이 달라졌다. “네가 박태은 선생을 어떻게 아느냐?”

“삼촌이 소식 없이 집을 나가신 후 숙모가 시름시름 앓고 계셔서 제가 찾아 나섰어요. 평양 갑부 박태은 선생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방학을 이용해 찾아가려고 했으나 숙모님 병간호가 더 급해 못 갔어요.”

“안 오기를 잘했다. 왔더라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 말은 한곳에 붙박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의, 양의를 몇 십 년 공부하고도 숙모 엄살병 하나 못 고쳤다면 그거 돌팔이 아니냐?”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숙모가 나섰다. “당신이 노는 색시들한테 등골 뽑히느라 소식 한번 못 전했다는 말은 않고….”

“알 만한 사람이 어찌 그렇게만 생각하는가? 두꺼비가 엎드린 것은 덮치자는 뜻일세.”

두꺼비가 엎드린 것은 덮치자는 뜻, 그 말속에 답이 들어 보였다. 그 때 동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많은 조선족이 이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불교신문3318호/2017년8월5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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