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하는 여행

행복한 오늘은 추억이 된다. 상처받은 오늘 이었다면 이 또한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기뻤던 슬펐던 시간이 흘러도 또렷이 남아있는 기억은 언제가 시간을 되짚어가는 여행의 단초가 된다. 지난 13일 빛바랜 사진첩 속 한 장을 떠 올리게 하는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모습이다.

지나온 삶은 하나의 궤적을 그린다. 그 흔적을 되짚는 과정은 시간여행이 된다.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합치고 폭을 넓히고, 옛사람들의 삶을 더한다면 지역의 역사가 된다. 여기서 확장의 폭을 더 하면 한 국가의 역사가 된다. 역사에도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숨기고 싶은 흉터와 같은 기억도 있다. 근대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강점기가 그렇다. 

먼저 도착한 곳은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이다. 현재는 ‘진포 사거리’에서 ‘연안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400m 정도의 철길 구간만 온전히 남아있다. 이 철길 양옆으로 추억의 교복 대여점,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팔았던 소위 불량식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어 영화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2008년 열차 운행이 중단되기 전까지 실제 마을을 관통하는 열차가 다녔다. 당시에는 1970년대 지어진 2층 건물사이로 아슬아슬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이 매일 이어졌다. 

군산 동국사 전경. 높게 솟아오른 지붕이 전형적인 일본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때려부숴도 시원치 않다던 적산가옥을 비롯한 일본식 건축물들은 언젠가부터 아프면 아픈 대로 기억하고 보존해야할 대상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이 복잡스럽게 많다. 그냥 비릿한 바다내음 따라 군산항 뜬다리(부잔교)로 향했다. 이 다리는 일제가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원활히 송출하기 위해 세웠다. 밀물과 썰물의 조수간만 차이에 맞물려 다리가 상하로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총 3기가 만들어졌고 당시에는 큼직한 3000톤급 3척의 배를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는 대단한 시설이었다. 군산항 주차장에는 현재도 철길 흔적이 남아있고 근처에 옛 세관건물과 옛 일본 18은행건물 등이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되어 있다.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세금을 거두었던 세관건물은 당시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로부터 붉은 벽돌을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화려하게 지었다. 현재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일본 18은행은 일본 지방은행으로 열여덟 번째 생긴 은행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07년 지어진 군산 지역 최초의 은행이다. 현재는 보수 복원 공사를 통해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모두는 효율적 수탈을 위해 지어진 시설물들이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군산 동국사(등록문화재 제64호)다. 일제강점기 500여 개에 이르던 일본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일본식 사찰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적산가옥과 함께 훼손돼 사라졌지만 동국사 대웅전과 요사채 그리고 범종은 온전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를 보존해 교훈으로 삼고자 했던 스님들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산항 부잔교. 일제강점기 수탈된 조선의 쌀은 이곳을 지나 일본으로 향했다.

곡선의 멋을 강조하는 우리 전통 양식과는 달리 지붕이 급경사를 이뤄 위협적이다. 일본 범종 옆에는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앞으로 대한해협을 상징하는 아담한 연못이 있다. 뒤로는 동국사 개산 기념일에 일본 조동종에서 1992년 발표한 참회와 사죄의 글이 담긴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 일본 정치권력에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했고 특히 한반도에서는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리는데 첨병이 되어 황민화 정책을 추진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내용이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 평화의 소녀상에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리본이 달린 목걸이를 걸어 놓았고, 그 하나의 목걸이에는 또 다른 노란리본이 덧붙여지고 있다. 동국사는 전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사찰의 역할을 뛰어넘어 역사의 변곡점을 기억하는 소중한 현장으로 남을 것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표지판.

 

동국사에 마련된 ‘평화의 소녀상’은 한·일 양국의 올바른 역사인식 출발점을 시사해준다.

 

입구에서 바라본 동국사.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사찰이라는 현판이 뚜렷하다.
왜소한 크기의 일본 범종. 시계가 귀하던 시절 군산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1년에 한 번 부처님오신날 종을 친다.

[불교신문3317호/2017년7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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