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정토 태어나 불법 보고 들어 깨닫기를…”

 

극락전 계단 조각 원찰 상징

조선 후기 유행 불단 ‘조화’

얼굴 크고 돌출된 코 특징

조각승 화승 합동작업 증명 

신흥사 아미타삼존상(위), 아래 왼쪽부터 불상 축원문, 극락보전 천장에 표현된 왕과 왕비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문구, 왕과 왕비의 기일이 기록된 국기일 현판.

신흥사는 조계종 제3교구본사로 설악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을철이면 관광객들이 단풍 구경을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단풍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로 기억되는 신흥사는 필자에게는 비 내리는 무더운 여름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2011년 조선시대 기록문화재 연구를 진행하면서 방문했을 때도 여름이었고, 극락보전 맞은 편에 위치한 보제루에 보관 중인 조선시대 경판을 정리하기 위해 찾았던 때도 2014년 6월 말 여름이었다. 남편과 함께 이곳에 갔을 때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내렸다. 보제루 안에서 비가 오는 여름 날 경판을 정리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책장에 보관 중이던 경판을 꺼내 인경(印經)을 위한 사전 분류와 논문을 쓰기 위한 기초 조사를 하던 그때가 생각나는 것은, 며칠 전 필자가 살고 있는 청주에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인 것 같다.

2014년 조사 당시 신흥사 보제루 안에는 경판과 함께 범종, 법고와 목어, 불화, 현판 등 다양한 사찰의 역사를 전해주는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기록한 ‘국기일(國忌日)’ 현판이었다. 태조 이성계와 그의 두 부인의 기일부터 영조와 그의 부인 정성왕후 기일까지 기록된 국기일 현판은 1774년에 조성된 것이다. 1774년에는 영조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기일은 그의 사후인 1776년 이후에 삽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흥사에서 해마다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냈던 것은 “1801년(순조 1) 벽파스님과 창오스님 등이 용선전(龍船殿)을 창건하고 여러 임금의 위패를 봉안했다”는 신흥사 사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이 1800년 6월28일 타계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는 1802년과 1803년에 신흥사에 많은 물품을 하사하고 신흥사를 정조의 기신재를 지내는 왕실 원찰로 삼았다. 

극락보전은 1647년 봄에 공사를 시작해 1648년 가을에 상량하고 1649년에 완성되었다. 이후 1749년, 1770년, 1786년, 1821년, 1921년 등 총 5회에 걸쳐 중수되었는데, 안에는 2011년 9월에 보물 제1721호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의 계단과 기단에는 귀면, 태극문, 모란, 사자 등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계단에 새겨진 조각들은 홍징스님과 홍운스님에 의해 1761년에 완성되었고, 돌을 다듬은 솜씨가 조선팔도의 돌계단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전하고 있다. 비 온 뒤에 만난 계단의 소맷돌 좌우에 표현된 튀어 나온 두 눈과 소용돌이치는 눈썹을 가진 도깨비 얼굴은 사천왕의 얼굴을 닮아 있고, 벌린 입 속의 가지런한 이빨과 대조를 이룬 돌출된 어금니는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선한 것을 지키기 위한 무서운 형상을 한 사천왕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하나의 계단으로 되어 있던 극락보전의 계단이 현재처럼 3개로 된 것은 1977년에 보수하면서 고쳤기 때문이다. 계단이 완성된 1761년은 영조 37년으로 신흥사는 영조와 그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803년 부총스님이 쓴 <용선전기>에 의하면 신흥사는 오래 전부터 여러 임금의 위패를 봉안하고 추모했으며, 영조와 그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후원으로 전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락전 계단에 새겨진 조각들은 왕실 원찰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신흥사 극락보전의 불단에는 우물 ‘정(井)’자형 틀을 조각하고 둥근 원 속에 ‘주상전하 수만세, 왕비전하 수만세’ 등의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불상 위 황룡 등이 새겨진 닫집에서도 왕실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신흥사는 효종과도 깊은 관련이 있던 사찰로 짐작된다. 효종은 1650년에 향로 한 점을 보냈으며, 그와 함께 청나라에 배척 주장을 폈던 김상헌(1570~1652)의 문집인 <청음전집(淸陰全集)> 일부 판본이 신흥사에 전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 

신흥사 극락보전과 계단 소맷돌에 표현된 도깨비 얼굴.

병자호란 이후 1637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한 후 청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다. 인질로 잡혀갔던 형인 소현세자가 청나라 문물을 접하고는 중원의 새주인으로 자리잡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편 것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김상헌 역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끝까지 청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청나라로 압송되어 6년 후에야 풀려났다. 

신흥사 극락보전 안에는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상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대세지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조선 후반기에 유행한 거대한 불단과 불상의 위에 있는 닫집 등은 아미타삼존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미타삼존상은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 삼존상과 함께 1651년 8월에 조각승 무염 일파가 나무로 조성한 것이다. 

전라도 지리산 벽암각성스님은 효종 3년인 1651년 당대 최고의 선승들, 조각승 무염과 함께 강원도 설악산 신흥사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했다. 벽암각성스님은 전라도에서 활동하던 그의 문도들인 건축장, 조각승, 화승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와서 극락보전과 아미타삼존상 등을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염스님은 1635년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삼세불상, 1649년 서울 불암사 관세음보살상(원 봉안처 완주 묘련암), 1650년 대전 비래사 비로자나불상(원 봉안처 안심사), 1650년 무주 관음사 관음보살상, 1651년 신흥사 목조 아미타삼존불상과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1652년 완주 정수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상, 1654년 불갑사 지장삼존상과 명부 권속, 1954년 고창 문수사 목조 삼세불상, 1656년 전주 송광사 나한전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등을 조성한 유명한 조각승이다. 

신흥사 아미타여래상은 얼굴이 크고 특히 분명하게 돌출된 코가 특징이다. 1650년 이전부터 나타나 광해군에서 경종 때까지 유행한 돌출된 큼직한 코는 목조 불상에 보편화되었는데, 신흥사 아미타불상에도 시대적인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상체는 상하로는 짧고 좌우로는 넓은 편이며, 하체는 넓어 정삼각형에 가깝다. 반달 모양의 머리에는 부처님의 상징인 살상투(육계)의 표현은 뚜렷하지 않지만, 1650년 전후의 보편적인 목조불상의 특징인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나타나고 있다. 15세기 중국 불상의 영향을 받은 뾰족한 정상계주는 굵은 원통형으로 변하는데 무염스님이 1652년에 조성한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불상에서 등장하는 특징이다. 

관세음보살상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복장 기록은 축원문과 발원문 2점이다. 조선 국왕인 효종과 그의 비인 인선왕후 장씨의 장수를 축원하고 있다. 다른 불상의 발원문에서는 ‘주상전하와 왕비전하 수만세’라고만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신흥사 불상에서는 ‘조선국왕 이수명만세(朝鮮國王李壽命萬歲)’ ‘왕비전하 장씨수만세(王妃殿下張氏壽萬歲)’라고 하여 성씨까지 기록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효종(1619~1659)의 친모인 인렬왕후 한씨는 이미 1635년에 타계했기 때문에 계모인 장렬왕후 조씨(1624~1688)와 세자의 만수무강을 함께 기원하고 있다. 

불상을 만든 조각승들은 ‘조성화원질(造成畵員秩)’에 기록하고, 불상의 밑그림을 그린 화승들은 ‘화성화원질(畵成畵員秩)’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대부분의 불상 발원문에는 조각승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조각승과 화승들이 합동작업으로 조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흥사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한 목적은 “먼저 돌아가신 모든 이들이 서방극락정토에 태어나서 불법(佛法)을 보고 들어 무생(無生)을 깨닫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라고 불상 축원문에 잘 나타나 있다. 1649년에 완성된 신흥사 극락보전에는 1651년에 조성된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가 1649년에 승하했기 때문에 신흥사 아미타삼존상은 인조의 명복을 빌면서 효종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불교신문3317호/2017년7월26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