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경주 돌이라고  

다 옥석은 아니다. 

용성은 이것이 아니다싶었다. 

그렇다면 바람 따라 

다시 돛을 올려야 한다. 

곧 봉익동에 

조그마한 민가를 구입해 

그리로 포교소를 옮겼다. 

그 다음 대문에 

포교소라는 이름 대신 

‘대각교(大覺敎)’라는 

현판을 걸었다.

“교수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의술이 무엇입니까?”

“테크네(techne)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네, 압니다.”

“데모크리토스(Dmokritos)가 ‘철학은 의식으로 억누르기 어려운 감정을 없애고 의학은 몸에 질병을 없앤다’고 했지.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의술은 치료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될 때가지 치료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 의학이야.”

“그럼 사람의 병은 의술로 치료한다 하겠으나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립니까?”

동규의 질문이 내외과적 임상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은엽 역시 인간의 의식에 대해 연구를 해둔 것이 없어 확실한 대답을 들려 줄만한 것이 없었다.

“최근 이론인데, 정신분석이 내적갈등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프로이트(Freud)의 이론을 비판한 카렌 호나이(Karen Horney)란 사람이 있지. 그를 신프로이트학파라고 부르던데, 신경증은 참된 자기를 스스로 소외시키고, 신경증적 자기를 고집하는 것에서 생긴다는 거야. 치료는 곧 참된 자기의 발견, 즉 자기실현에 있다고 했더군.”

“중동학교 오세창 교장선생님이 사적으로 저희 고숙이 되십니다.”

“그래? 아주 훌륭한 분을 집안 어른으로 모시고 있군.”

“하루는 출타하시면서 따라오라고 해 갔더니, 백용성스님을 소개해줘서 뵈웠지요.”

“뭐야! 백용성이라고 했나?”

은엽은 움칫했다. 용성이라는 말 이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백’자가 귀에 번쩍 뜨였다.

“네.”

“용성이 전라도 남원고을의 옛 이름 아닌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용성이란 사람, 남원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게 들은 것 같습니다.”

“아니 그 방물장수가….”

얼결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교수님, 방물장수라니요?”

동규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냐, 아냐…, 내가 딴 생각을 하다가 튀어나온 소리야.”

동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냥 흘려 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 백용성이란 사람이 뭐라고 하던가?”

은엽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어느 학교에 다니냐구 묻기에 의학전문학교에 다닌다고 했더니, 방금 교수님께 드렸던 말씀처럼 사람의 병은 의술로 치료한다 하겠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전설과 사원의학(Temple medicine)을 이은 헤라클레이데스(Herakleides)는 의학을 철학에 비유한 플라톤(Platn)의 제자라고 했지요. 흔히 의사의 아버지라 한 히포크라테스는 헤라클레이데스 아들인데, 사람의 병도 요인을 꼼꼼히 찾아 올라간다면 의학이 마음의 병까지 다스리지 않겠느냐고 그리스 기초의학을 들어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뭐라고 하든가?”

“불교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종교다, 그러더군요.”

백용성이란 사람이 승려이고 보면 옛 신비설을 의술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옛날에는 꿈을 점치는 것(ゆめうら), 신의 계시(しんたく) 같은 것을 학설(神秘說)로 만들어 의술처럼 생각해 왔다. 나중에는 좀 더 발전해 창이나 칼에 다친 데는 지혈을 하고 진통약을 썼으며, 내복약으로는 술, 마늘, 꿀, 산양 젖을 말린 것에 곡식가루를 섞여 먹였다. 산속에 사는 승려라면 지금도 그런 것을 의술이라고 생각할지 몰랐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두려고 한 건가?”

“생각을 많이 해봤죠. 제가 의학을 공부해 훌륭한 의사가 된다 해도 낮과 밤이 한 찰나도 쉬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도 늙으면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이 희어져 추한 모습이 되겠지요. 그래서 병이 들면 제가 제 병을 고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제가 배워왔던 의술도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겠구나 했지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의사의 명예가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던가?”

“그 명예가 우주의 본질과 유형무형 사물의 근원까지 꼭 집어 가르쳐 준다고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같이 잠을 자도 꿈이 다르듯, 눈 먹던 토끼와 얼음 먹던 토끼가 제각각인 것을 보면 나무도 층암절벽에서 자란 나무가 있다. 이쯤 되면 쑨 죽이 밥이 될 까닭이 없다.

“그래 출가를 할 생각이구먼?”

“낳고 죽는 문제와 맞서고자 하면 일거에 한 순간 생각을 탁! 소리가 나게 깨뜨려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로서는 그 장단에 춤추기 어려운 말이구먼.”

“저도 결정을 하기까지 그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동규의 그 말은 한 번 빼든 칼 도로 꽂지 않을 것이란 다짐이 있어 보였다.

“그래도 본과를 마치고 시작하지 그러나?”

난봉자식 마음 잡아봐야 사흘 안 걸린다는 걸 모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저도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은엽은 가르치던 제자와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물었다.

“자네한테 부탁할 말이 있네.”

“무슨 부탁입니까?” 

“출가를 하면 백용성이란 그 사람한테로 가겠구먼?”

“네, 그럴 생각입니다.”

“그러면 말이지, 백용성 그 사람이 승려가 되기 전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봐 주겠는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릴 적에 남원 어디에서 살았는지 그것도 알아줬으면 좋겠고….”

동규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용성이 가회동 강영균 사랑으로 옮겨 선불교 표교를 계속했으나 신도가 생각처럼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사동 강씨집 사랑에서보다 더 줄어든 기분이었다. 환경이 좋고 넓고 훌륭한 대갓집인데 왜 신도수가 줄어드는가. 하루는 가회동 포교소를 찾아가던 신도들이 골목길로 접어들더니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지금 경성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는가?”

“27만에서 30만 안쪽일걸.”

“경성에서 밥술 먹고 배꼽 팡팡 뚜드리고 사는 놈들은 다 일본놈들 수족 아니면 일본 종놈들로 봐야할 거야. 그러니 어림잡아 경성 사람 반은 일본 물이 노랗게 들었다고 봐야할 걸?”

“그럴지도 모르지, 강영균이란 그 사람도 일진회 회원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용성선사가 친일분자 집에서 선불교 포교를 한단 말인가?”

“글쎄 말일세, 용성선사도 이회광과 강대련처럼 친일 물이 들어간 것 아닐까?”

“허허! 그렇다면 애먼 우리들만 애그러지게 나가다 어그러지게 돌아오겠구먼?”

“쉬쉬! 시끄럽네, 하늘이 두 쪽 나도 용성선사가 그런 분은 아닐세.”

신도들 사이에서 나돈 소문을 용성선사가 모를 리 없었다. 용성의 애초 계획은 조선 땅덩어리를 정토로 바꿔놓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지가 되어버린 땅에서 죽지 못해 사는 민생들을 송병준이 이끈 일진회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토살하고, 안중근의 총격에 이또가 사살되자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가열되었다. 한일병합이 체결된 후 일본 특무기관과 통감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매국적 소임을 열렬히 자행해 왔다.

경주 돌이라고 다 옥석은 아니다. 용성은 이것이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면 바람 따라 다시 돛을 올려야 한다. 곧 봉익동에 조그마한 민가를 구입해 그리로 포교소를 옮겼다. 그 다음 대문에 포교소라는 이름 대신 ‘대각교(大覺敎)’라는 현판을 걸었다. ‘대각’은 한순간에 탁! 소리가 나게 생각을 확 깨져야 한다는 뜻이다. 나라가 일본 식민지가 되어 줏대 없는 조선사람 반 이상이 일본놈이 못되어 안달이 나 있는데, 언제 화두를 들고 틀고 앉아 대오(大悟)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자는 것인가. 어차피 이차방정식에서 실수로 나타낼 수 없는 허수는 털어버릴 수밖에…. 대성(大聖)께서도 과거에 지은 잘못은 벗어날 길이 없다고 했고, 연줄이 닿지 않으면 구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생명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니르바나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나무를 해다 장에 내다 판 일자무식 나무꾼도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모양 없는 것으로 보면 곧바로 훌쩍 뛰어넘어 실제로 성스러운 것을 본’ 일이 있었지 않았는가. 이것이 ‘대각교’다. 이 대각교에 모인 사람들이 ‘대각회’다. 용성은 더욱 열심히 선불교 포교를 펼쳐 나갔다.

[불교신문3316호/2017년7월22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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