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품 보시 출가자에 맞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경제력에 

맞지 않는 거액보시도 가상하나 

출재가 경제공동체 훼손할 수도…

어떤 기독교인이 교회에서 건물을 신축하는데 헌금을 많이 내라는 목사의 압력에 힘들다며 불교에서는 그런 고통이 없느냐고 물었다. 불교라고 다를 것은 없다. 스님이 불사를 하면 신도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기독교는 십일조라는 제도가 있어 소득의 10분의 1은 반드시 교회에 바쳐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있는데 반해, 불교는 그런 강제규정이 없다. <성경>에는 분명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라고 명시돼 있다. 다만 그때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십일조는 세금에 해당하므로 오늘날 정부에 세금을 내는 기독교인이 다시 교회에 소득의 10분의 1을 내면 이중 과세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 명시적으로 그런 설명이 없기에 목사가 소득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면 교인은 내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보시를 더 강조하는 종교일 것이다. 경전을 보면 보시에 대한 내용이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설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를 내야 한다는 수리적 표현은 없다. 대승불교에 오면 보시를 더욱 강조하고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과다한 보시를 칭찬하는 구절이 경전에 있지만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보시에 대한 태도는 이와는 다르다.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불리는 초기불교 경전이야 말로 부처님의 의중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헌이다. 문헌학적으로 밝혀졌지만 대승불교 경전은 후기의 불교학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인 것처럼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부처님의 제자 아난의 말인 것처럼 쓰고 있을 뿐이다. 물론 대승불교 경전이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니 불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뜻에 맞게 확장 발전해온 측면도 있고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 혼자 만들었다기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공동으로 만든 종교이기 때문이다.

<사분율>은 “어떤 집에 가기만 하면 언제나 밥과 여러 가지 공양거리를 주었으므로 그 집이 가난해졌다. 사람들이 ‘그 집이 먼저는 큰 부자이어서 재물이 많았는데 사문 석자들에게 공양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재물이 다하여 빈궁함이 이와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문에게 공경 공양하면 도리어 빈궁함을 얻을 뿐이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이를 아시고 ‘너희들은 어찌하여 자주자주 거사의 집에 가서 음식 공양을 받아 그 집이 이처럼 가난하게 하였느냐’고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그 집에 가서 갈마(磨)를 하여 여러 비구들이 그 집에서는 밥을 받아먹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 집의 재물이 다시 많아지면 갈마를 풀어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계신다”고 설한다.

초기 불교 경전 곳곳에서 출가자가 재가자의 경제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려는 부처님의 배려가 나타나 있다. 재가자의 보시에 의존하여 출가자의 경제생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처님은 재가자와 출가자를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셨다. 만약 재가자의 생산력이 훼손돼 생산이 감소하면 출가자에게 가는 미래의 보시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출가자에 대한 보시는 재가자의 생산력이 증가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미래 보시도 증가한다. 

음식도 지나치게 많이 받으면 안 되지만 부처님은 고가품이나 사치품은 아예 받으면 안 된다고 금지하셨다. 사분율은 “어떤 믿음이 있는 장인 바치가 뼈, 상아, 뿔 같은 것으로 바늘통을 만들어주었는데 그로 인해 가난해졌고 사람들이 ‘사문 석자에게 공양한 뒤로부터는 집이 가난해져서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 공양을 하는 까닭은 복덕을 바라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재앙을 얻었구나’라고 비구들을 비난했다. … 부처님께서 ‘어찌하여 장인 바치에게 상아, 뼈, 뿔 같은 것으로 바늘통을 만들게 하여 그의 재물을 다하게 하였느냐’고 꾸짖으셨다.”

사치품이나 고가품은 소욕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출가자에게는 맞지 않기도 하지만 이러한 보시는 시주하는 신도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에 금지하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뭐든지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자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보시하면 된다. 그렇다면 얼마를 보시해야 할까? 경전에는 이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증일아함경>은 “자기의 소유에서 남는 것이 있으면 남에게 나누어 준다”고 설하고 있다. 불자는 여유 있게 생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남는 것을 보시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거액의 보시를 한다면 비록 가상하기는 하지만 부처님이 생각하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경제공동체를 훼손하는 보시인 것이다.

[불교신문3316호/2017년7월22일자] 

 

윤성식 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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