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단어가 발음으로는 

근소한 차이지만 

‘버려야 할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영역이 

된다는 것

이 일이 문득 

생각이 난 이유는

최근 만난 한 중년의 

남성 때문이다 …

최근까지 대학교 어학교육기관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던 나는 다른 일상에 적응하면서 언어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얻었던 신선한 깨달음을 주는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곤 한다. 그만큼 한국어 교사 시절 말이 자연스럽지 못한 외국인 학생들이 무심코 저질렀던 사소한 말실수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로 하여금 반성하게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수업 시간, 주제어로 ‘썩다’는 표현을 배우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6개월이 갓 넘은 서른 중반의 한 남학생이 전라도 어딘가에서 홍어를 먹은 적이 있었다. 자메이카에서 온 이 남학생은 한국에서는 다소 흔한 ‘삭은 음식’을 그때 처음 먹어 보았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때 먹었던 홍어의 시큼하고 오묘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 표정을 있는 그대로 찡그리며 홍어를 가리켜 ‘썩은 음식’이라고 말했다. ‘삭은’과 ‘썩은’이라는 두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음운의 유사성 때문에 혼동이 생긴 것이다. 일그러진 표정과 홍어를 입에 넣으며 코를 잡는 제스처까지 보인 그는 다시 한 번 ‘삭은 음식’에 대해 ‘먹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먹기 힘들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썩은 음식, 썩은 음식’이라고 강조해 말했다. 

‘썩다’와 ‘삭다’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비슷하게 들릴 법한 단어다. 그런데 그 친구의 표정과 말에 웃음이 났던 나는 그 두 단어가 발음상으로는 근소한 차이지만 의미로 보면 ‘버려야 할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영역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발효식품, 김치, 된장, 젓갈과 같은 음식은 삭아야 맛이 난다. 그런데 그 음식들은 썩으면 버려야 한다. 근소한 음운의 차이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반드시 버려야 할 것으로 구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말이다. 

이 일이 문득 생각이 난 것은 최근 만난 한 중년의 남성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 어떤 일을 통해 제작한 물품을 한 마디의 칭찬 없이 힐난하기 바빴다. 이미 결과물이 나온 상태에서는 어떤 힐난도 결과를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제작 과정에서 조언을 하거나 제작에 참여해 본인의 의지대로 제작물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그는 항상 어떤 과정에서도 조언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조언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결과물에 대해서만 아쉬운 점, 잘못된 점,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한다는 점이다. 

그의 한 마디로 인해서 잘 만들어진 결과물은 한순간에 ‘잘못 만들어진 물건’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 말로 인해 ‘애써서 잘 만들어진 결과물’이 될 수도 있고, ‘다시는 이렇게 만들면 안 되는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꾸기 어려운 결과물이라면 차라리 의미 없는 격려나 칭찬의 한 마디가 오히려 더 나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근소한 차이로 ‘버려야 할 것’과 먹기는 힘들지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에는 우리가 매일 쓰는 말에도 있다는 사실을 그 중년의 남성 덕분에 새삼 깨닫고 스스로 신중해진다. 예로부터 우리말에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교훈하는 속담이 많다. 그런 속담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말에 대한 경구들은 이미 많이 있지만 말 한마디 때문에 살인을 하고,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갈 희망을 얻고, 위안이 되고,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외국인 학생의 일례로 다시금 되새겨 본다.

[불교신문3315호/2017년7월19일자] 

신효순 시인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