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필세가 마음에 든 것은 

이 작은 백자 필세가 

금강산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한 뼘 남짓한 지름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높이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필세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지인의 집에서 필세(筆洗) 하나를 보았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중앙에 큰 산이 있고 그 둘레엔 물 담는 곳이 있으며, 다시 이것을 크고 작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산들은 청화(靑畵)와 진사(辰砂, 동)로 꾸며진 단풍이 물든 가을 산의 여실한 모습이다. 

지인은 대뜸 내게 필세가 어떠냐고 물었다.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라고 대답했다. 정말 볼수록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필세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과거 선비들이 서안(書案) 위에 두고 사용했던 벼루와 연적(硯滴), 필세에 대한 로망을 한 번쯤 가지게 된다. 나는 이 중 필세가 제일 좋다. 글쓰기의 시작과 마무리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전엔 붓을 필세에 담갔다가 붓털을 가지런히 다듬으면서 문장을 어떻게 쓸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함께 해 주고, 다 쓴 후엔 묻은 먹을 씻어 내면서 탈고했다는 안도의 마음을 가지게 해 준다.

더더욱 지인의 필세가 마음에 든 것은 이 작은 백자 필세가 금강산(金剛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필세에 물을 담아 보니 금강산임에 틀림이 없다. 마치 물속에 단풍으로 물든 가을의 금강, 풍악산(楓嶽山)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한 뼘 남짓한 지름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높이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필세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담고 있는 것이다. 

청화와 진사로 울긋불긋한 색을 넣어 만든 산 모양의 백자 필세와 연적은 주로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했다. 이때 만든 것 중에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뜻하는 ‘만폭석산(萬幅石山)’이라는 글씨가 있는 연적도 있다. 조선후기 선비들은 금강산 모습을 닮은 산 모양의 백자 필세와 연적을 만들어 감상할 정도로 금강산은 평생 꼭 한 번 여행하고 싶은 그러한 곳이었다. 

사실 금강산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행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불교 성지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이 금강산에서 일만이천의 보살을 거느리고 <금강경>을 설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바로 일만이천의 보살을 상징한다. ‘금강’도 금강석 같은 단단한 지혜로써 생사의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법을 설한 금강경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침 전날 읽었던 김용덕의 <효봉스님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효봉스님(1888-1966)이 금강산에서 출가했던 이야기를 지인에게 들려주었다. 효봉스님은 사형 선고를 내린다는 것에 고뇌를 느껴 법관을 그만두고 엿장수로서 전국을 떠돌다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금강산 도인을 찾아 갔다.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로, 신계사로, 그리고 보운암으로 석두스님(1882~1954)을 찾아 올라갔다. 그리고 출가했다. 

산 모양 백자 필세를 다시 보았다. 동해 바다 가운데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암자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인에게 효봉스님이 출가했던 바로 그 신계사 보운암이 아닌지 물어보았다. 물론 그 곳엔 효봉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스님의 게송 한 말씀이 들려오는 듯하다. “종일토록 주인을 찾았건만, 온 것도 없고 간 것도 없네./ 다만 이 산중에 있으련만, 구름이 짙어서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네./ 만약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일념으로 번뇌의 구름을 없애버려라./ 번뇌의 구름이 사라져 그 주인을 보니,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였네.”

[불교신문3315호/2017년7월19일자] 

배재호 논설위원·용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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