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용성은 조약문서를 찢어 불사르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섰다. 

1700년의 전통불교에 어찌 저런 

도토리 같은 중들이 있는가. 

용성은 임제종을 들고 일어섰다. 

한용운, 박한영, 김경운과 

‘조선불교임제종중앙포교당’을 설립 

용성이 개교사장을 맡고 

한용운이 포교당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4월8일 

3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용성은 법좌에 올랐다.

“알겠는가?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그들이 누구인가.

나는 모르겠네.

태평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

제국주의 군대는 …” 

용성은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시급히 해결할 문제가 장소였다.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분들을 차별 없이 도대능용(道大能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얼굴이 해맑고 부티까지 풍기는 선비타입의 중년남자가 찾아왔다.

“대사님, 인사 올립니다.”

옷차림도 깨끗했고 교양도 있어 보였다.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여 위 가회동에 사는 강영균(康永勻)이라 하옵니다.” 

무력감에 빠진 백성들과는 달리 기가 팔랑해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

“대사님께서 선불교를 설하신다기에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외람됩니다만 포교장소에 대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겸손해하실 건 없고 말씀해보시오.”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한의사로 전에 광제원 원장을 역임한 사람이었다. 소문을 듣고 선불교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열 골 물이 한 골로 모이듯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늦게 도착하면 법회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벼락에 매미처럼 붙어 대사님 말씀을 들으려고 깨금발로 담 안을 넘겨다보는 사람들이 많아 퍽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나라고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한 말씀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뭘 거리낄 것 있소? 말해 보시오.”

“가회동 소생의 집이 여기보다 넓습니다. 제가 사랑채 하나를 대사님께 드릴테니 장소를 그리로 옮기심이 어떨까 싶어 여쭙습니다.”

일념이면 통천(一念通天)이란 이런 것인가. 용성이 고심하고 있던 장소문제의 핵심을 콕 찔렀다.

“허허, 사과나무에도 배가 열린다더니….”

싫지 않았다. 제공하겠다는 사랑채가 설령 똥 싼 왕골자리라 해도 장소가 넓다고 하니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처음 만난 사람이 배포가 대들보만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예사가 아니려니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지혜가 아닐 듯 싶었다. 호사다마라, 외바늘 귀 터지기 쉽다는 말이 있듯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 번 대질러 볼까.

“숙향전이 고담이란 말이 있소이다.”

“대사님, 사주에 없는 관을 쓰면 이마가 벗겨집니다.”

이거 봐라! 대번 말을 척 받아넘겼다.

“어허허허…!”

용성은 흔쾌히 웃었다. 이튿날 그가 시간을 맞춰 찾아와 가회동 그의 집으로 갔다. 위치는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였고, 예전에 멋깨나 부리고 권세깨나 누리던 사람이 살았던 듯 운치 있게 키운 정원수 사이에 정자 몇 채가 자리해 있고, 주변 환경이 놀라울 만큼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마구간과 곳간이 딸린 사랑채도 여러 채였고, 바깥마당도 드넓어 광장 같았다. 도대체 강영균이란 사람의 재력이 얼마나 여유가 있기에 해인사 극락암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이런 멋스러운 저택에서 사는가. 

“대사님께서 여기 오셔서 선불교 법회를 여시면 이곳을 암자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암자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만, 장소가 넓으니 법회장소로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용성은 강영균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대사동 강 거사 사랑채에서 가회동 강영균 집으로 포교소를 옮겼다.

그렇다고 용성이 생각하고 있는 과제가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더 큰 과제는 조선 땅덩어리를 정토로 바꿔놓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화두가 전제되어 실천이 따르는 문제였다. 수행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까맣게 높은 하늘에서 던져져 땅이 잡아끄는 힘과 떨어지는 속도가 딱 맞춰져야 모든 것이 정지해버리듯, 그런 아슬아슬한 지점에 흔들림 없이 마음을 두고 있어야 해탈에 이르는 법이거늘, 일반 대중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생명 있는 것들은 숨 줄을 달고 삶의 공간에 던져진 순간부터 성가시고 귀찮은 일로부터 출발한다. 낳는 것이 성가시고, 늙는 것이 성가시며, 아픈 것이 성가시고, 죽는 것이 성가시다는, 빤히 아는 이야기 말고도 꼭 있어야 할 것을 얻으려 하는데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대로 원한이 맺혀 저 녀석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 했으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새벽바람 사초롱 같은 그리움으로 살랑거리는 심장을 빼 식기 전에 건네주어도 모자랄 사랑하는 연인을 돈 있고 권력 있는 놈이 가로채,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역설을 시로 읊으며 산다. 어찌 그것뿐인가, 숲속에 가면 모기, 변소에 가면 똥파리, 풀밭에 가면 진드기, 외딴 곳에 가면 강도…, 하여간 별별 것들이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해 항상 가슴이 떨린다. 여기에 나라까지 빼앗겨 다달이 세금폭탄, 조금만 잘못해도 잡혀가 왜놈들한테 얻어터지다보니 백성들 살림살이는 나그네가 먹다 남긴 김치국인들 아니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철딱서니가 있는지 없는지 선불교를 이야기한다고 하니, 선량한 민중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라기보다는 되레 이상기류 같아 용성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저 많은 아픔과 저 많은 고통의 낱알들을 편안하고 안락한 곳으로 옮겨놓아야겠는데, 뾰족한 수가 없어서 봄날 생말가죽 말라가듯 가슴이 타들어갔다.

그때 의병장 박한국, 김봉안이 전북에서 체포되고, 정세창은 태인에서 체포되었다. 상하이에서는 독립운동단체 동제사가 조직되고, 손정도, 조성환은 일본 육군대장 출신 가쓰라 타로(桂太郞)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의병장 전성근도 체포되고, 이석용은 장수군 내진면 사무소를 습격하다 체포되었다.

불교계는 또 다른 양상이었다. 일본놈을 상전으로 모신 모리배 반민족 중들이 달밤에 달을 보고 짖는 미친개처럼 노랗게 일본물이 들어 제 세상이나 된 듯 설쳐대는 꼴이라니, 대표적인 자가 이회광이었다. 말이 좋아 조동종 중놈이지 ‘니뽄도’를 찬 낭인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깊숙이 개입한 다케다 한시의 달콤한 말에 엿장수 맘대로 엿판 합치듯 1908년 원흥사에 세운 조선 원종과 일본 조동종 연합을 체결했다. 거기에다 남의 떡으로 낯내듯 동래 범어사와 양산 통도사를 조동종 관할 사찰로 편입시키려 했다. 이회광은 미친개들과 고기를 나눠먹듯 조선 사찰을 일본 사찰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용성은 조약 문서를 찢어 불사르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섰다. 1700년의 전통불교에 어찌 저런 도토리 같은 중들이 있는가. 용성은 임제종을 들고 일어섰다. 한용운, 박한영, 김경운과 한양 중부 사동(현 승동교회)에 ‘조선불교임제종중앙포교당’을 설립, 용성이 개교사장을 맡고 한용운이 포교당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4월8일 3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용성은 법좌에 올랐다.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주장자를 세우고 사자후를 토했다.

“알겠는가?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그들이 누구인가.

나는 모르겠네.

태평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

제국주의 군대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밤송이는 누가 삼킬 것이며 금덩이는 누가 삼키는가.

할?!”

그러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삼촌 소식이 끊긴 채 몇 해 세월이 지났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면서 놈들의 관제(官制)에 따라 1911년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술(1910)년 3월 신입생을 선발했는데, 하동규라는 키가 크고 얼굴이 준수한 학생이 들어왔다. 저렇게 네모반듯한 학생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을까. 은엽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항상 성적이 상위권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예과 마치고 본과로 올라갈 무렵 동규가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성적이 특별히 우수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 모범이 되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선서가 아니라도 의료의 윤리적 지침을 어김없이 따라 인류에 봉사할 자질을 갖춘 학생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은엽은 동규 학생을 만났다.

“시간을 내 나를 한 번 찾아오게.”

“네, 알겠습니다.”

며칠 지나 동규 학생이 은엽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 마주 앉았다.

“듣자 하니 학교를 그만 둔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

“네!”

고개를 들고 똑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동학교를 졸업했더군?”

대답 없이 은엽만 쳐다보았다.

“성적이 좋은 걸 봤어…, 그리고 중동학교는 자주자립, 창조개척, 애국애족을 이념으로 삼는 학교인데, 그 정신으로 여기서 의학을 공부해 민족에 헌신하는 것이 보람된 일 아니겠나?”

“제가 학교를 그만 두려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가?” 

[불교신문3314호/2017년7월15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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