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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⑫ 순천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조선 양반들이 보살상에 머리 숙인 까닭은?
  •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 승인 2017.07.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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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부르면 언제나 도와주는 보살

시주자 조각승 명단 발견돼 ‘주목’

소현세자 아들 경안군 부부 보호 다짐  

사천왕 무릎 아래 각반 찬 모습 ‘이채’ 

송광사 관세음보살상과 복장 유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발원문이 기록된 저고리, 시주자 명단, 관세음보살상, 관음전 안 벽체에 표현된 인물들.

불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양한 문양으로 장엄된 3칸 건물의 관음전 안은 분위기가 엄숙하다. 한 단 높은 곳에 마련된 불단 위에는 다른 절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상이 지긋이 눈을 반쯤 뜬 채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중생의 고달픔을 해결해 주는 감로(甘露)가 든 정병(淨甁)이 들려 있다. 왠지 관세음보살상의 표정이 마음을 흔든다.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한 후 정신을 가다듬고 좌우 벽을 바라보았다. 좌우 벽면에는 대칭으로 총 14명의 나이든 신하들이 홀을 들고 고개를 숙여 왕을 경하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나이든 신하들은 조선시대에 기로소(耆老所, 나이 70이 되면 ‘기’, 80이 되면 ‘노’라 한 데서 기원한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70세 이상의 기로에게 경로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봄·가을 연회를 열어 약을 내려준 것이 시초가 되어, 조선시대 퇴임 관리들의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에 소속된 나이 일흔 살이 넘는 정2품 이상의 문신들인데, 이 건물이 바로 고종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1902년에 건립된 성수전(聖壽殿)이어서 이들이 고종에게 경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앙에는 고종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어진(御眞) 대신에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등의 관직을 가진 인물들이 임금을 향해 예를 갖추듯 관세음보살상을 향해 허리와 머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왜 관세음보살상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을까.

순천 송광사 대웅전 향좌측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관음전이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부르는 곳에는 언제든지 가서 도와주는 보살이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9년 11월 2일 개금불사를 위해 복장을 열게 되면서이다. 

관세음보살상 복장에서는 저고리를 비롯한 의류 2점, 시주자 명단 1점, 직물 조각 11점, 전적 8종 17권, 다라니 2종 423매, 후령통 1점, 유리편 1점 등이 발견되었다. 조성과 관련된 내용은 저고리 안감에 기록된 발원문과 배자에 기록된 원문, 그리고 시주자와 불상 조성에 관여한 스님과 조각승을 기록한 명단이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관음전의 주불인 관세음보살상이 비운으로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세 번째 아들 경안군을 위해 궁중 나인 노예성이 1662년에 조성했다는 발원문 내용이었다. 

“성품을 돌이켜 들으시고 두루 원만함을 깨달았네/ 관음불이 관음의 이름 주시고/ 위로는 자비의 힘을 갖추고 아래로는 자애를 갖추게 하니/ 32응신이 온누리에 두루 미치네/ 경안군 이씨와 부인 허씨 두 분이 장수하기를/ 경자생 박씨와 노씨가 장수하기를/ 윤씨가 장수하기를 기원합니다/ 신축생 나인 노예성이 발원하여/ 1662년 정월에 관음보살상을 삼가 조성하니/ 이로써 공덕이 두루 미치고/ 나를 비롯한 일체 중생이 함께 성불하기를 기원합니다.”

조선시대 왕실 인물 가운데 타고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대표적인 인물 중에 소현세자가 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1595~1649)는 무력한 왕이었고, 현명한 그의 아들 소현세자(1612~1645)는 명청의 교체기에 너무 일찍 세상을 읽은 혜안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왕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간 후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소현세자는, 굴욕적인 삼전도의 항복을 한 아버지 인조와 갈등을 겪었고, 1645년 귀국 후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현세자는 아내 민회빈 강씨(1611~1646)와의 사이에 3남 5녀를 두었으나 그의 아들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소현세자 사후 인조는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 하였고, 민회빈 강씨는 1646년 인조의 밥에 독을 넣은 혐의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으로 그의 어린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1648년 첫째 아들 석철은 장독으로 죽었고, 둘째 아들 석린 역시 병으로 죽게 되었다.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은 작은 아버지 효종이 왕이 되자 1656년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1659년에 경안군으로 칭해졌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22세인 1665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네 살 때 형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니 그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이 조성된 1662년은 봉림대군의 아들 현종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이며, 경안군이 부인 허씨와 혼인한 해이며, 궁중 나인 노예성이 62세가 되던 해였다. 경안군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궁중 나인들에 의해 양육되었을 것이며, 그녀들이 어머니 역할을 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상을 발원한 노예성은 아마도 경안군보다는 아버지 소현세자나 어머니 강씨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혼인을 한 경안군이 오랜 유배 생활로 인해 얻은 몸과 마음의 병이 하루 빨리 치유되어 만수무강하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또한 자식 없이 사는 나이든 궁중의 나인들 역시 아무 탈 없이 평안하게 노후를 보내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또 기원했을 것이다. 

조계총림 송광사 관음전.

송광사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은 1662년 당시 왕실의 상황과 송광사의 모습을 유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궁중 나인 노예성과 박씨,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 부부, 당시 송광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취미수초(1590~1668) 등이 대표적인 시주자이다. 이외에도 관음보살상 조성에 참여한 스님으로는 고흥 능가사 창건주인 벽천정현, 원철, 탄원 스님 등 벽암각성 문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송광사 부도전(浮圖殿)에 취미수초 스님을 비롯해 벽암각성 스님의 승탑이 있는 것은 조선후기 송광사가 이들 문도들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순천 송광사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데 1754년에 영조의 생모를 위한 원당(願堂)과, 1886년에 고종·민비·세자의 탄생을 축원하는 축성전(祝聖殿)이 건립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현 관음전은 1902년에 건립된 성수전으로 1957년에 성수전 앞에 있던 관음전을 헐고 관세음보살상을 성수전으로 옮긴 후 관음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17세기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관련된 관세음보살상이 20세기 초 고종황제의 전패를 모셨던 성수전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관음전 내부 벽화는 기로소의 나이든 관리들이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모습인데, 관음전의 보살상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마치 관세음보살상을 향해 예를 갖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여러 관리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크기가 92.3cm로 유리장 안에 모셔져 있다. 화려하고 큰 보관에는 중앙에 스승인 아미타불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불꽃이 둘러싼 보주와 꽃으로 장엄된 보관은 왕실에서 시주를 한 것을 상징하듯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다. 전반적으로 얼굴이 큰 편인데 특히 보관과 양 측면에 화염 장식을 이용해 관의 띠를 매달았다. 특히 수평으로 휘날리는 곡선의 관대(冠帶)는 상체가 하체에 비해 더욱 커 보이는 느낌을 준다. 

순천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의 가장 큰 특징은 두 무릎 밑의 표현법으로, 꽃무늬와 구름무늬 아래에 늘어진 수식 등이 사천왕이 무릎 아래에 각반(脚絆)을 차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조선후기 17세기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한 조각승 혜희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1655년 조각승 혜희가 금문과 함께 조성한 법주사 원통보전의 관음보살상에서도 등장한다. 

무릎 아래에서 발목까지 차는 각반은 조선후기 보살상에서 가끔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순천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의 경우 궁중 나인 노예성이 스스로 무장한 관세음보살이 되어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경안군 부부를 보호하겠다는 다짐을 조각승 혜희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불교신문3313호/2017년7월12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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