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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의 고승전] <18>동곡당 일타대종사“20년후 서양청년이 해인사에 오면 나인줄 알라”

 

친외척 가운데 41명이 출가한

신심 깊은 불자가정서 태어나

구도일념으로 손가락 연지공양

장좌불와 등 6년간 결사 정진

지계청정 수행풍토 진작 위해

투철한 청정계행 실천한 율사

동곡당 일타대종사(東谷堂 日陀大宗師, 1929~1999)는 선사(禪師)요, 율사(律師)이다. 일생을 화두참선의 정진 일념으로 살았으며 한국불교의 청정승가 가풍을 위해 율장 연구와 정립에 진력했다. 참선수행으로 깊고 오묘한 선리(禪理)를 체득했으며 지계청정(持戒淸淨)의 수행풍토를 진작시키려 율장을 탐구하고 몸소 투철한 청정계행을 실천했다. 자운스님의 율맥을 이어받은 스님은 종단의 전계대화상으로 셀 수 없는 출가수행자를 이끌었다.

일타스님은 여느 출가수행인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스님의 친·외척 41명이 출가했다. 이는 한국불교사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스님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구도일념으로 손가락을 불태운 연지공양(燃指供養)을 했다. 오른손 엄지손가락만 남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불태웠다. 스님은 구도에 있어서는 얼음장보다 더 차갑고 비수보다 더 예리하고 독한 심정을 지녔다. 그런가하면 당신의 언행으로 인해 조그만치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 불자가 있을까봐 늘 챙겼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자비와 배려심은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따사로왔다.

법상에서의 스님 설법은 변재(辯才)가 수승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처럼 다정다감하다가도 천길 폭포처럼 우렁차기도 해 자유자재했다. 듣는 이들을 울리고 웃기는 건 여반장이었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 같으나 듣고 나면 깊은 울림이 있어 큰 감동을 갖게 했다. 

스님은 말년에 “나도 미국에서 죽어 그 곳에서 태어나련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수행인이 되어서 온 세계를 무대로 부처님 법을 널리 펴겠다”고 했다. “나 죽은 뒤 20여 년 후 노랑머리에 키가 멀쭉 크고 코가 우뚝한 서양청년이 해인사 일주문 앞에서 ‘내가 왔노라’하면 그 사람이 나인줄 알아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고 한다.

일평생 후학들에게 참선을 강조했고 참선한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했던 스님. <서장(書狀)>을 1만번 읽어라. 그러면 툭 트인다고 했다. “좋은 스승은 상좌의 근기를 보아야 한다”면서 제자에게 “너는 성미가 급하니 여유를 갖고 정진하라”고 일러주었다. 

송광사 3년결사를 끝내고 찾아온 상좌에게 ‘너는 결사를 끝냈는데 나는 그동안 투철한 정진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이런저런 사람 만나느라 나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 이제 3·7일간 묵언정진 할테니까 니가 날 찾아오는 사람 막는 문지기 노릇해라’던 스님. 그래 놓고도 스님은 당신을 찾아왔다가 쫓겨 가는 신도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찾아온 신도를 제자가 쫓아 보낸 날에는 저녁공양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제자에게 스님은 “너는 중생들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겠냐”고 했다. 해인총림에 있을 때다. 산중 어른들이 의견을 모아 일타스님에게 주지를 맡기기로 했다. 일타스님은 그 말을 듣고는 아무에게도 말없이 걸망지고 해인사를 떠났다. 결국 나중에 주지를 맡기도 했다.

제자들에게도 ‘주지하지 말라’고 늘 말했다고 한다. 말년에 병든 몸을 시봉하는 상좌에게 ‘내가 전생에 너를 시봉했으니 금생엔 네가 내 시봉하는구나’하면서 간병하는 상좌에게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스님이다. 

제자사랑이 극진한 일타스님은 자기 앞으로 출가해 스님이 된 상좌의 장삼을 손수 바느질해 만들어 주기도 했다. 

도움말 : 혜국스님(석종사 금봉선원장), 향적스님(해인사 주지), 돈관스님(은해사 주지), 혜찬스님(해인사 기획·홍보국장), 혜관스님(달성 월인사 주지).

자     료 : 일타대종사 법어집(동곡문도회 편)

▩ 일타스님 삶과 수행      

청정승가 가풍 잇기 위해 진력한 대율사

일타스님은 1929년 9월2일(음력 8월1일) 충남 공주군 우서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부친 연안 김씨 봉수와 모친 광산 김씨 상남의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사의(思義). 1936년 공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스님은 1942년 졸업하고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스님의 출가는 막내 외삼촌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다니다 입산했다. 사의는 외삼촌이 일러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큰 뜻을 품고 통도사로 가면서 스님은 시 한수를 읊었다. 출가시다. “세속은 좁아 감옥과 같아서/ 모든 고뇌가 이로부터 생긴다/ 출가는 광활하여 허공과 같아/ 모든 즐거움이 이로부터 일어난다.”

1943년 윤고경스님을 은사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45년 통도사 보광중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송광사 삼일암으로 가서 효봉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를 보내고 그해 동안거는 속리산 복천암에서 지냈다. 1949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아 지녔다. 1950~1952년 진주 응석사 금오스님 회상, 범어사 동산스님 회상, 창원 성주사 성철스님 회상에서 안거했다. 1953년 3월 자운스님의 권유로 통도사 천화율원에서 석암, 지관스님과 함께 율장을 연구하고 중수계법을 정립했다.

1954년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지냈다. 이때 스님은 ‘오직 중노릇 잘 하는 데만 일생을 바치겠다’는 대서원으로 혼자 적멸보궁으로 올라가 하루 3000배씩 7일 기도를 하고 손가락을 태우는 연지(燃指)를 했다. 이때 스님 나이 26세였다. 

당시 스님은 대학에 가서 세속 학문을 연구할 마음도 있었고 여느 스님처럼 일본 유학에 대한 꿈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단번에 다 끊었다. 중이 되었으면 오로지 ‘중노릇’을 잘 하자고, 모든 욕망들을 먼지로 불살라 떨쳐버렸다. 

1955년 불교정화운동의 와중에서 동안거를 서울 선학원에서 지내고 태백산 도솔암으로 향했다.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로 6년간 혼자 결사에 들어갔다. 1956년 3월22일 이른 아침 행선(行禪) 중 홀연히 한 생각 크게 일어 법희선열(法喜禪悅) 속에서 게송을 읊었다. 스님의 오도송이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1960년 지리산 화엄사에서 전강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보내고 1961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지월스님, 서옹스님을 모시고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1962년 조계종 정화대책 중앙비상종회의원(율장부문)이 되고 대덕 법계를 품수했다. 1963년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됐으며 교육위원, 법규위원, 감찰위원, 역경위원, 우리말 팔만대장경 편찬위원에 추대됐다. 1964년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회상에서 하안거, 동안거를 하고 1965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안거했다. 1972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10명의 태국 스님으로부터 전통구족계를 중수(重受)했다. 여러 경전과 어록에서 가려 뽑은 글 모음집 <법공양문>을 출간했다. 1973년 인도 네팔 미얀마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 10여 개국의 불교성지를 순례했다. 1974~1975년 태백산 도솔암에서 정진했으며 1976년 해인총림 율주로 <사분율의>, <불교와 계율> 등을 번역, 저술해 출판했다. 한편 해인사 지족암에 머물면서 법당 재건과 요사채 등을 중수했다. 1977년 불국사 선원에서 월산스님과 하안거와 동안거, 1978년 지족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1980년 미국 LA 고려사에서 포교하고 1981년 북남미 잉카 마야유적을 돌아보았다. 1982~1983년 지족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으며 1984년 해인사 주지로 선출되기도 했다. 1987년 간경화에 걸렸으나 수행으로 이겨냈다. 1989년 중국 불교성지순례를 했으며 1990년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에서 정진했다. 1991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 답사를, 1992년 오스트레일리아 순회포교를 했으며 출가 50주년 기념 <범망경보살계>(전5권)를 출간했다. 1993년 구족계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됐으며 법어집 <시작하는 마음>을 출간했다. 1994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되고 은해사 주지에 취임했다. 이 해 <시작도 끝도 없는 길>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늘 깨어있는 마음>을 출간하고 <법공양문>을 재출간했다. 

1995년 원로의원과 해인총림 수좌, 율주,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됐으며 법어집 <기도>를 출간했다. 1996년 은해사 조실로 추대됐으며 1997년에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를 출간했다. 1999년 <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를 출간했으며 1999년 지병이 악화돼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하다 같은해 11월29일(음력 10월22일)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랍 58세. 같은해 12월5일 은해사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을 봉행했으며 사리 542과를 수습했다. “하늘에 밝은 해가 참된 마음 드러내니/ 만리에 맑은 바람 옛 거문고를 타는구나/ 생사와 열반이 일찍이 꿈이려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방해롭지 않구나(一天白日露眞心 萬里淸風彈古琴 生死涅槃曾是夢 山高海闊不相侵).” 스님의 열반송이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같은 글을 남겼다. “진실한 말로 내 그대들에게 전별을 고하노라. 파도가 심하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방이 그윽하면 등불이 더욱 빛나도다. 그대들에게 마음닦기를 간절히 권하노니 감로장을 기울어지게 하지 말지니라.” 

스님은 저서 20여 종과 육성녹음 ‘감로법문’ ‘보살의 길’ 등을 남겼고 영상기록물로는 ‘해인삼매’ ‘마하반야의 세계’ ‘보살계법문’ ‘교수불자회 수련 법문’ ‘영가법문’ 등이 있다.

[불교신문3313호/2017년7월12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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