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은 나라꼴이 하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 서산대사가 주장자대신 

칼을 들었던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토란 놈 목을 밧줄로 매 

개처럼 끌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무예를 연마한 장수가 아닌 

사문이라 힘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용성은 해인사로 내려가 있다가 

잠시 범어사에서 머물렀다.

한데 방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다.

“한용운이라 합니다.” 

용성이 한양으로 돌아오니 이완용의 집(남대문 밖 중림동)이 불에 탔다. 성난 민중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푸들(poodle)’이 된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나라가 무엇인지 더 잘 안 민중들이 가재도구, 패물, 고서적, 신주까지 부지깽이로 쏘삭거려 모두 불태워 없앴다.

용성도 이완용이 고종황제의 양위를 협박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으나, 자세히 들어보니 귀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랄 노자였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본국으로부터 질책을 당한 이토가 이 기회에 조선정부의 주권을 말살할 기회로 삼았다. 당장 매국내각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인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겸 일진회 총재인 송병준을 불러 고종황제를 끌어내려 패대기를 치라고 호통을 쳤다.

이 푸들들이 고종을 찾아가 했다는 이야기는 협박이 아니라 비수를 옆구리에 들이댄 살인미수 수준의 공갈이었다. “일본이 선전포고할 권한을 갖고 있다. 빨리 양위하라. 이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조선이 쑥밭이 된다.” 그래도 고종이 뻗대자, 송병준이 “양위를 하지 않을 거면 자결을 해 사직을 구하라!” 허수아비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안색이 달라져 다른 대신들 의견을 물으니 아무도 입을 연 사람이 없었다. 

“폐하, 자결을 못하겠으면 천황폐하를 찾아가 사죄하십시오!”

이번에는 이완용이 나섰다.

“하세가와 대장한테 무릎을 꿇어 항복을 고하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비십시오!”

이것이 친일이다. 고종이 자리를 뜨자, 내각이라고 남은 사람들이 과붓집 문고리 빼들고 엿장수 부르듯 황제의 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로 결의했다. 그 날 3차례 어전회의에서 군부대신임시서리 이병무가 칼로 위협한 가운데 내관 2명이 고종을 대신해 황제 양위식을 거행했다. 그래서 이척(李, 고종의 둘째아들)이 순종황제가 되었다.

용성은 나라꼴이 하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 서산대사가 주장자대신 칼을 들었던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토란 놈 목을 밧줄로 매 개처럼 끌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무예를 연마한 장수가 아닌 사문이라 힘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용성은 해인사로 내려가 있다가 잠시 범어사에서 머물렀다.

한데 방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다.

“대사님 문안드리옵니다.”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얼굴이 짜글짜글, 체구까지 대추씨처럼 다부지게 생긴 수좌였다.

“처음 뵙는 분이신데 뉘신지…?”

“한용운이라 합니다.”

한용운, 한용운…, 30대 초반의 수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늦게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산속에 숨어사는 사람 이야기를 듣다니 어느 산문에서 수행하시오?”

“저는 백담사로 출가해 거기서 지냈는데, 종헌스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종헌스님?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어서 고개를 들었다.

“고운사 종헌스님 말씀이오?”

“네, 설악산으로 수행하러 오셔서 같이 지낸 적이 있습니다.”

니 미칫나? 밥 무가면서 해라! 억센 경상도 억양을 쓰는, 그래서 ‘탱글탱글’이라 별명을 붙여놓은, 그 종헌이 맞는 것 같았다. 말씨와는 달리 마음씨가 곱던 종헌스님이 생각나 빙긋이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 그 스님께서는 어느 절에 계십니까?”

“대사님 말씀 낮추십시오.”

이것이 남당남장불회두(南撞南墻不回頭)라 하는 것인가. 남쪽 담장에 부딪쳐 아프지 않으면 머리를 돌리지 않는다는, 깡다구가 펄펄 뛰는 젊은 수좌가 대뜸 자세를 낮추었다.

“처음 만난 자린데 그럴 수 있겠소?”

“아닙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제가 앉아 있기 거북합니다.”

말씨도 쇳소리처럼 야무졌다.

“그래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우?”

“일본에서 오는 길입니다.”

일본? 의외였다. 머리에 문자가 들어 좀 돌아간다 싶으면 너도나도 일본으로 가 일본중이 되어 돌아왔다. 

“그럼 일본에서 유학하고 오는 길이우?”

용성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유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 팔꿈치를 제가 물지도 못하는 주제에 놈들 불교를 배워 뭘 하겠습니까? 도대체 뭘 하는 놈들인지 구경 좀 하러 갔습니다.”

이야기가 달랐다.

“그래 어떻습디까?”

“놈들 불교는 신돕디다. 우리 할머니들이 꾸러미 밥을 싸 나무에 달고 사파쐬, 사파쐬하듯 해요.”

“그렇더라도 신도가 일본의 고유 종굔데 그리 쉽게 얕볼 수 있겠소?”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들어가 습합된 것 같습디다. 놈들은 신을 신성시하지 않아요. 신을 자기와 똑같이 생각한 것 같습디다. 얘, 나 지금 혼인할 처녀 만나러 가는데, 즐겁고 복된 일만 있게 해줘. 그러고 빌면 그렇게 된답니다.”

“거, 즉심시불이 따로 없구먼?”

“즉심시불이라니요?”

용성은 대답이 길어질 것 같아 화제를 바꿨다.

“그래 그런 걸 보려고 일본까지 갔단 말이오?”

“조동종에 들러 대표라는 히로쓰 세쓰조(弘津說三)도 만나고, 그곳 학교에 들어가 놈들 말도 배우고, 조선 유학생 최린과 고원훈과도 사귀고 왔습니다.”

구경하러 갔다더니 공부를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럼 공부를 더하지 않고 왜 돌아왔소?” 

“헤이그특사 파견 후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이토가 황제를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을 체결, 한국 내정을 장악했다는 것은 알고 있소.”

“나라가 이 지경인데, 일본에서 책만 읽고 있어야겠습니까?”

수좌의 이야기에 강단이 있고 생긴 것처럼 열혈남아의 본색이 나타났다.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양으로 올라가 이토 이놈부터 죽이고, 이완용, 송병준 요놈들을 죽여 놓겠습니다.”

하나 한일합병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에서 시작해, 그 정한론을 이어받은 이토 히로부미의 ‘대륙웅비(大陸雄飛)’정책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렇게 정교하게 계획된 한반도의 먹구름이 하루아침에 쉽게 걷히지야 않겠지만, 우리 승가에 저런 결기를 가진 수좌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용운이 한양으로 올라간 그해 용성은 지리산 칠불선원으로 가 돈교의 요지를 밝힌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었다. 만주로 망명, 의병항쟁을 벌이던 안중근이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만세’를 부른 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뤼순감옥으로 옮겨져 수감되었다고 했다.

일본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배알이 뒤틀린 놈들은 앞뒤 가리지 않았다. 이듬해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헌병경찰제를 보강 속전속결 식민화에 나섰다. 

1910년 8월22일 기어이 창덕궁 흥복헌에서 군주가 나라를 버리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순종은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해온 대일본황제에게 나라를 양여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불알 두 쪽이 달그락 소리를 나게 바쁜 사람이 이완용과 데라우치였다. 순종의 전권위임장을 손에 쥔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사전에 작성된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음으로서, 조선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4년 만에 셔터를 내렸다.

여기서 나라는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이완용은 포상금 15만원에 백작 작위를 받고, 철종의 사위 박영효는 포상금 16만8000원에 후작 작위를 받았다. 송병준은 포상금 10만원에 후작 작위를 받고, 박제순은 포상금 10만원에 자작 작위를 받았는데, 포상금과 작위를 받은 사람이 60여명에 달했다.

반면 황현, 박병하, 민영환, 박세화, 김가진, 이근주, 이만도, 장태수, 이중언, 김근배 등은 한일병합에 분을 삭이지 못해 자결하고, 이학순, 한규설, 이상설, 홍범식, 안숙, 이재윤, 김도현, 정동식 등 14만명에 이르는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불교신문3310호/2017년7월1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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