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끝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 타인을 이끌어 주되 

어떤 관념도 생기지 않아야 보살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자질이 뛰어난 남자나 여인이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내었다면 마땅히 어떻게 발심을 유지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자질이 뛰어난 남자나 여인으로서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낸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는 마땅히 모든 중생을 열반의 세계에 들게 할 것이다’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느니라. 그러나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한 뒤에는 참으로 열반에 들게 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에게 ‘나’라는 관념·‘사람’이라는 관념·‘중생’이라는 관념·‘목숨’이라는 관념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여, 실제로는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내었다고 할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구경무아분’ 다음 회에 계속)

양 소명태자(梁 昭明太子, 501~531)가 구분한 제17분의 제목 ‘구경무아(究竟無我)’를 직역하면 ‘끝끝내 나라고 할 것이 없다’가 되는데, 범본(梵本)을 보면 ‘법에는 자아가 없다’고 되어 있으며 쿠마라지바 역본에는 ‘무아법자(無我法者)’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끝끝내 실체가 없다’고 번역하면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의 겉모양이나 사상의 표현에 대해 절대적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무소유(無所有)’를 ‘갖지 않음’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불교적인 해석이 아니다. 불교에서 ‘유(有)’는 ‘존재,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소유(所有)’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무소유’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애초에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도리를 바로 알아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제17분의 시작은 마치 제2분의 되풀이처럼 보이지만, 제2분이 처음 발심하는 보살에 대한 것이라면 제17분은 이미 발심한 보살이 어떻게 그 발심을 유지하여 수행하며 자신을 항복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도고마성(道高魔盛) 또는 도고마상(道高魔上)이라는 말이 있다. 둘 다 같은 뜻으로 ‘도가 높아지면 장애도 커진다’는 뜻이다. 처음 마음을 낼 때에는 태산도 무너뜨릴 기세로 수행에 임한다. 그 용맹함이 오래 수행한 이들도 견주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질 않는다. 팽팽한 긴장감은 옆 사람도 불편하게 만들지만, 당사자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결국 자기가 만든 스트레스에 스스로가 무너지면서 급격한 실망감에 빠져 버린다. 그래서 ‘밤새 안녕!’이라고 자취를 감춰 버리기도 하고, 또는 “저는 틀렸나 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는 이들이 생긴다. 이것을 어른 스님들은 ‘말뚝신심’이라고 한다. 

처음 발심한 그 마음이 지속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점차 꾀를 내게 되고 나태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수행은 이미 끝났다고 보면 된다. 말뚝신심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생명력을 불어넣어야만 한다. 자기 귀에 즐거운 달콤한 얘기가 아닌 쓴 법문도 듣고, 때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 교학이나 선어록도 파고들어가 보며, 때로는 무릎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좌선도 해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처음 마음이 유지된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발심을 그대로 유지하면 반드시 성불한다’는 뜻이다.

보살은 처음 발심한 그대로 ‘모든 이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겠다’는 그 마음을 유지해야 하고, 또 실제로도 깨달음에 이르게 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일으켜선 안 된다. 만약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자만심이 생기고 대접받으려는 생각이 일어날 것이며, 그로 인해 괴로움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며, 수행도 물 건너간 것이다.

불교수행에 있어 최대의 장애는 관념이다. 최선을 다해 타인을 이끌어 주되 어떤 관념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참된 보살이다.

[불교신문3310호/2017년7월1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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