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의장 종하스님-부의장 암도스님 이력

신임 원로회의 의장 종하스님

원로회의 의장 종하스님 

“나 자신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일부가 아닙니까. 그러니 ‘나는 우리, 내가 곧 우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먼저 맑게 하고 남에게 관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임 원로회의 의장에 추대된 종하(宗夏)스님은 종단에서 원로 가운데 원로다. 출가 이후 60여 년 가까이 주요 소임을 거치며 종단의 안정과 화합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1972년 이후 9차례에 걸쳐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을 지냈으며 제10대 중앙종회 의장으로 일했다. 방송포교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불교방송 제2,4,6대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불교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입법 행정기관의 요직에 몸담으며 종단 발전에 지혜를 발휘해온 스님은 그만큼 종단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1962년 통합종단 후 1994년 종단개혁까지 종단은 숱한 고비와 격동을 맞았으나, 커다란 흠결 없이 사태를 수습하고 진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로의장에 추대되면서 남긴 일성인 “첫째도 화합 둘째도 화합 셋째도 화합”에도 원만한 성품이 잘 드러난다. 좌우명 양보와 하심(下心)은 울림이 크다. “나를 낮추고 내 것이 아니면 결코 욕심내지 않는 무욕(無慾)”의 자세로 정진해 왔다.

스님의 은사는 당대의 대강백(大講白)으로 존경받던 고봉스님이다. 어릴 적부터 머리 모양이 ‘청골’이어서 스님이 될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대학생 시절 출가를 결심하고 고봉스님을 찾아갔다. 그러나 어른은 “나이든 ‘늦깎이’는 세속 물을 빼기가 매우 어렵다”며 거부했다. 3번을 조른 끝에 겨우 입산할 수 있었던 종하스님은 고봉스님 아래서 혹독하게 공부했다. 스승은 뺨을 몇 대 때리며 ‘이뭣고’하고 묻기를 반복했다. “지금도 그 화두를 들면서 늘 초발심을 되새긴다”는 스님은 범어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봉암사 범어사 선원을 순회하며 참선정진에 몰입했다. 오늘날의 성취는 투철한 인욕(忍辱)의 결과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큰스님으로서의 면모는 묵묵하고 오래된 자비행에서도 드러난다. 2009년부터 종단의 공익법인 ‘아름다운동행’에 기금을 꾸준히 희사했다. 총 8차례에 걸쳐 1억여 원을 조용히 쾌척했다. 2010년과 2011년 각각 아이티 지진과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성금을 냈고 논산 육군훈련소 호국연무사 건립에도 작지 않은 힘을 보탰다. 아프리카 아동들을 위한 탄자니아 보리가람농업기술대학 건립을 위한 불사금도 보시했다. 별도의 전달식 없이 진심으로 건넨 ‘무주상보시’로 귀감이 됐다.

종하스님은 원로회의가 끝난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임 의장단 스님들의 뜻을 잘 이어받아 이제까지 종단이 추구해온 방향 그대로 나갈 것임을 여러분들에게 천명한다”고 강조했다. 승가공동체의 안정과 화합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지론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지론이다.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애종심은 본받을 만 하다. “종교지도자는 수행과 덕목을 갖추어야 하고, 대중과 화합을 으뜸으로 삼고, 선거에도 후유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립투사 안중근의 어록에 우리 국민을 향하여 남긴 말이 기억납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은 자기 이외로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는가?”

스님은 “교단은 일반 사회단체와는 다른 속성을 가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도 당부했다. 면면히 내려온 전통과 청규 속에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혁이란 거창한 말보다는 각기 제자리를 찾아 환기본처(還其本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으면 상하가 절속(絶俗)되고 교단은 세속화되어 시비가 끊어지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종단에 대한 시비와 저주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태에서 “모든 출가는 심출가(心出家)여야 하며 화합과 상생의 문화가 살아난다면 한국불교는 그 무엇보다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신임 원로회의 부의장 암도스님

 

원로회의 부의장 부의장 암도스님

부의장으로 선출된 암도(岩度)스님은 신명나는 설법으로 가장 유명하다. 상임포교사로 활동하던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서울과 부산, 대구 등을 오가며 전라도 특유의 입담으로 좌중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다. ‘이 시대의 (설법제일) 부루나존자’라는 별명으로 정평이 났다. 가는 곳마다 쉽고 재미있게 법회를 이끈다.

1955년 사미계를 수지한 암도스님은 서른이 넘는 나이에 동국대 불교학과에 뒤늦게 입학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향학열이 대단했다. 포교원장 교육원장을 지내며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정법(正法)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로서 호남불교의 명맥을 잇고 가풍을 선양하기도 했다.

암도스님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포교는 곧 수행과도 같다”고 강조했다. “옛날이고 지금이고 사회가 불교에 바라는 것은 ‘수도와 수행’ 단 두 가지 밖에 없다”며 “수도는 자기완성이고 수행은 사회완성”이라는 확신이다. 특히 “선방에서 100년을 있으면 무엇 하겠나? 초등학교 100번 졸업하는 것이랑 똑같다”며 “사회에 직접 나가 부딪혀야 한다”는 적극적인 보살행을 통한 사회의 감화를 역설했다.

1977년 동국대 종비생으로 서울에서 살 때 학비라도 보태기 위해 시작한 상임포교사다. 전법의 길은 벌써 40주년을 맞았다. 그간 전국 사찰 법회에서 설법한 것만 6000회를 넘겼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미와 더불어 누구나 쉽게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한계와 편견을 극복하고 생활 속에서 쉼 없이 불교의 정신을 실현하라”는 주문이다.

이즈음에는 전남 담양으로 주석처를 옮겨 마하무량사를 13년째 직접 가꾸며 모범도량으로 사격을 일신하고 있다. 대웅전 현판에 걸린 “나쁜 짓 하지 말고, 좋은 일에 힘쓰며, ‘참나’를 깨달아서, 모든 중생 가르쳐, 불국토를 이룩하라”는 법문은 스님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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