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500여 년간 

수행자를 노예 취급해온 

조선의 앞날이 잿불화로에 

불씨 꺼지듯 했다. 

“중국의 청정계율이 언제 

당신 나라에 전해졌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조선은 

사미계만 받으면 승려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계(具足戒)는 받았습니까?”

용성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허공의 해와 달이 

당신 나라의 해와 달인가? …

중국이 나라는 큰데, 

사람은 소인이로구먼!”  

용성은 그 때 중국에 있었다. 일본불교가 조선에 들어오니 왜색이 짙게 깔려 안질에 고춧가루가 되어갔다. 봉원사 승려 이보담, 화계사 승려 홍월초, 신흥사 승려 이회광이 오동나무 씨를 거문고로 알고 춤을 추듯 일본 정토종을 본 따 불교연구회를 설립했다. 기름 맛을 본 개 모양, 날만 새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이 조선침략에 불교를 앞세우더니 수행의 기강을 무너뜨려 고기 맛을 본 중들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용성은 해인사 대장경판 보수로 상궁 임씨와 인연이 되어 더러 황실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난다더니, 박쥐같은 간신들이 밤낮으로 얼굴을 바꿔 황상을 발 아래로 깔아뭉갰다. 500여 년간 수행자를 노예 취급해온 조선의 앞날이 잿불화로에 불씨 꺼지듯 했다. 외국의 적이 침입하면 나라 안의 적이 함께 일어난다 했던가. 을사오적의 주역으로 조선 외교권을 박탈하는 데 앞장을 섰던 대역적 이완용이 엎어진 나라 꼭뒤 차듯 앞장을 섰다. 낮에는 조선 권력자로, 밤에는 왜놈들 계략에 부역한 하수인으로, 누가 이 자를 높은 관직에 등용했는가. 앞에서 꼬리치고 뒤에서 발뒤꿈치 문 이 자들을 등용한 사람이 다름 아닌 고종 아닌가. 사필귀정이 여기에 맞는 소린지 모르겠으나 못난 놈이 잘난 척, 개똥도 모르면서 아는 척, 소리만 높여 있는 척, 속을 까뒤집어보면 조선 유생들 허세가 이러했다. 이 자들이 중국 천자와 일본 천황과 맞장을 뜨겠다고 고종을 황제자리에 올렸다. 이 자들이 누구인가. 자국의 백성들을 콩 볶듯 지지고 볶아온 삼각산 밑 짠물 먹은 그 잘 난 유가들 후손 아닌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이준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매국간흉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와 짜고 고종이 일본 국위를 떨어뜨렸다고 양위 협박에 나섰다. 요순시대나 있었던 양위…. 나라꼴이 이 지경이니 용성인들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빠진 나무 쓰러뜨리기로 작정한 내부 적들의 준동으로 고종황제는 피겨죽에 강도 맞은 모양새로 피를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나라야 어찌되든 잘 먹은 놈은 껄껄껄, 못 먹은 놈은 이를 뿌드득, 이것이 친일과 반일의 반응이었다. 미친 개밥에 달걀 같은 나라꼴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전투를 벌였지만, 나날이 증파된 왜놈 군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용성은 이웃 청나라도 이 모양인가 싶어 상황을 살피려고 운봉 임동수 거사와 북경으로 발길을 향했다. 가는 길에 몇 군데 사찰을 들러 중방교(현 北京 觀音寺街) 관음사로 갔다. 용성을 맞이한 관음사 방장이 해동제일의 선지식이 내왕했음을 알고 한 번 건드려보겠다는 듯 대거리를 해왔다.

“무엇이 자성을 깨달아 삶과 죽음을 초월(安心立命)한 것이오?”

용성이 대답했다.

“관음원은 쌀밥이 좋습디다.”

“밥에 대해 묻지 않았소이다.”

용성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관음원은 반찬도 좋습디다.”

스스로 체인(體認)해야 알 수 있는 말 밖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예의를 갖추고 용성을 상석에 앉혔다. 그 해 관음사에서 안거에 들었는데, 홍려사(鴻蘆寺)에서 한 승려가 찾아와 물었다.

“모든 깨달은 이의 머문 데가 어떤 곳입니까?”

“당신은 어느 지방 사람이오?”

“남방 사람입니다.”

“남쪽은 산수가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거 참 좋은 지방이군요.”

“무엇을 깨달아야 죽고 사는 것을 훌쩍 뛰어넘는 것입니까?”

“붉은 봉황새가 벽오동에 앉소.”

용성은 정미(1907)년 동안거를 관음사에서 마쳤다. 조선에서 선지식이 왔다는 소문이 퍼져, 성경성(현 瀋陽市) 장안사에서 선객이 찾아왔다. 그래서 선객에게 물었다.

“대덕께서는 장안에서 왔으니 장안사 일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감히 묻겠는데, 장안(長安)의 길이 어디에 있습디까?”

선객이 대답을 못했다.

이듬 해 2월 중국 3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푸퉈산(普陀山)에서 한 선객이 찾아왔다. 

“선기부동(璿機不動)하시다는 명호를 듣고 찾아 왔습니다.”

용성이 선객에게 물었다.

“보타산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남쪽 바다 가운데 있습니다.”

“경치가 어떠합니까?”

“바다의 푸른빛이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관음보살이 그 안에 계신다 하던데 그렇소?”

“그렇습니다.”

“신령스러운 감응은 저절로 느껴진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관음보살 모습을 보여주시오.”

선객이 대답을 못했다.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면 생각만 잠잠해져 헛된 수고를 하게 됩니다.”

한 입 건너고 두 입 건넌 청나라 선객들은 용성을 두고 귀소문 말고 눈소문 하라는 말이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용성은 쑤저우(蘇州)로 발길을 돌렸다. 쑤저우에는 고승 한산과 습득이 주지를 살았던 한산사가 이름 있는 가람이었지만 ‘달이 지니 까마귀 우는 하늘에 찬 기운 서늘하고, 강가의 단풍나무 아래 어선의 불빛이 시름없이 잠든다…’는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의 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산사로 한 선객이 용성을 찾아왔다. 그래서 물었다. 

“남쪽지방 깨달음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선객이 대번 부싯돌에 부시가 닿듯 게송으로 읊었다.

“강남 3월은 하나의 마음속에

자고새가 울면 온갖 꽃이 향기롭소이다.”

常憶江南三月裏 

啼處百花香.

그러고는 용성에게 물었다.

“조선의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외도 하나(大有)가 이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면 이만 아픕니까? 마음이 아픕니까?”

“어 헛?!”

용성이 큰소리로 할을 했다. 선객이 다시 물었다.

“온 힘을 기울여 물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방석으로 후려갈겼다.

방석을 맞은 선객이 합장을 하고 나갔다. 

용성은 퉁저우(通州) 화엄사로 갔다. 방장실에서 방장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함께 했다. 방장이 먼저 물었다.

“어느 절에 계시다 계를 받으셨습니까?”

“우리나라에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에 금강계단이 있습니다. 금강계단에서 수계했소이다.”

“중국의 청정계율이 언제 당신 나라에 전해졌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조선은 사미계만 받으면 승려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계(具足戒)는 받았습니까?”

용성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허공의 해와 달이 당신 나라의 해와 달인가? 석가세존의 가르침은 천하의 어느 나라도 관할할 수 없는 진귀(公道)한 것입니다. 이러한 ‘공도’를 어찌 중국에만 국한시키는가. 중국이 나라는 큰데, 사람은 소인이로구먼! 설령 그렇더라도 가운데(中)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외다. 남쪽에서 보면 당신 나라는 북쪽에 있고, 북쪽에서 보면 남쪽에 있지 않소? 동쪽과 서쪽에서 보아도 그러하거늘 무슨 근거로 가운데라 할 수 있는가. 그런 이야기로 사람을 업신여기면 끝없이 죄만 쌓일 것이외다. 알겠는가?” 

그리고 용성은 게송을 읊어주었다.

동쪽 2만 리(扶桑) 해가 비추니

강남의 바다와 산이 순조롭구나.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찾지 말라

신령스러운 빛은 어제나 오늘이나 막힘이 없다.

日照扶桑國 江南海岳紅

莫問同與別 靈光今古通.

청나라불교는 수행의 덕목을 잃은 일본불교의 침탈만 없다 뿐, 당·송 시대와는 격이 많이 낮아졌음을 알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불교신문3308호/2017년6월24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