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거량 한다고 나대지 말고 더욱 정진하라”

 

평생수행지침으로 ‘일일일식’ 

‘장좌불와’ 실천한 운수납자

후학에겐 ‘남을 도와라’ 등

수행자 지켜야 할 5계 전해

해인총림 방장 이어 원로의장

종정 맡아 종단 위상 드높여 

혜암스님은 눈 푸른 납자를 길러냈고 종단의 위상을 곧추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이 시대의 선지식으로 추앙받고 있다.

혜암당 성관대종사(慧菴堂 性觀大宗師, 1920~2001)는 조계종의 청정수행 가풍을 올곧게 지니고 평생을 정진일념으로 보냈다. 화두 참구로 성불에 이르는 간화선 수행에 대한 투철한 안목과 깊은 믿음으로 정진 또 정진의 일생을 살았다. ‘공부하다 죽어라’는 스님의 말씀은 후학에게 커다란 경책이요, 간곡한 당부로 깊게 새겨져 있다.

일생을 운수납자의 길을 간 스님은 하루 한 끼의 공양(一日一食)과 자리에 눕지 않고 꼿꼿이 앉아서 밤새워 정진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평생수행지침으로 삼아 이를 몸소 실천했다. ‘밥을 많이 먹지 말라’ ‘공부하다 죽어라’ ‘남을 도와라’ ‘주지 등 감투를 탐하지 말라’ ‘옷 한 벌 밥 그릇 하나인 무소유로 살아라’ 등은 스님이 출가수행자에게 일러주신 오계(五戒)다. 스님이 일러주는 오계는 출가수행자가 지켜야 할 자세다. 

스님이 머물던 해인사 원당암에는 ‘공부하다 죽어라’는 글이 새겨진 말뚝이 스님의 거처인 미소굴 앞마당에 콱 박혀 있다. 이 말뚝과 새겨진 글이 바로 스님의 일생을 일깨우고 있다. 

스님은 성철스님 열반 이후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돼 눈 푸른 납자를 길러냈고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과 종정으로 추대돼 종단의 위상을 곧추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혜암스님은 후학에게 참선수행을 강조했다. 스스로 화두참구로 일념정진했으며 불자들에게 이를 몸소 보여 주었다. “도량을 청정히 해야 한다. 항상 주변정리를 깔끔히 하라”고 일러 주었다. 작은 일이라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잔잔한 울림을 갖게 한다. 스님은 토굴에서 정진할 때도 홀로 있지 않았다. 뜻을 같이하는 대중과 함께 했다. 토굴을 떠날 때도 뒤에 오는 수행자를 위해 땔감이나 식량을 여유 있게 남겨 두었다. 또한 거처하던 당우에 손상이 간 것은 제대로 고쳐 놓았다. 

제자가 중노릇을 잘못하면 스승이 잘못 가르친 것이라면서 올곧게 제자들을 이끌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일상은 후학의 귀감이었다. 시줏물을 중하게 여기고 공물(公物)을 사사로이 쓰는 것을 엄하게 따졌다. “공부하는 데는 다 때가 있다.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간곡히 일러 주었다. 후학의 정진을 독려하는 데도 여느 어른과 달랐다. 공양을 하는 데도 제자들에게 결제한 지 20일 지난 뒤부터 오후불식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두 달 뒤엔 일일일식을 했다.

한 달 간 용맹정진 할 때였다. 단식 용맹정진을 한 달 간 한다하니 제자들은 용맹심과 분발심이 일었다. 첫 주일부터 묵언이었다. 스님 지도 아래서 용맹정진을 한다, 게다가 단식하면서 하는 정진이라 큰마음을 낸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라 단식을 이어나가기는 정말 힘들었다. 그러는 중에 한 제자가 스승 모르게 떡을 먹고 병이 났다. 단식 도중에 떡을 먹었으니 창자가 꼬인 것이라 했다. 스승은 그 제자를 병원에 보내지를 않고 “단식을 계속하라”고 했다. 그게 스승의 처방이었다. 제자들은 아무 말 없었다. 단식을 보름 하고 나니 제자들에게 새로운 기운이 생겨났다. 

한 제자는 그때의 정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20여 일을 단식해도 죽지 않더라. 여태껏 나의 살림살이는 그때의 정진이 밑천이다.”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정진하니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경계가 드러났다. 스승은 그 제자에게 준엄히 일렀다. “법거량 한다고 나대지(돌아다니지) 말고 그 경계는 큰 마장(魔障)이니 더욱 더 화두일념으로 정진하라.”

스님의 제자 챙김도 각별했다. “스님의 제자가 되려고 왔습니다”하니 “행자생활 하고 나서 보자. 행자실에서는 나를 알아서 왔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거라”고 했다. ‘누구의 소개로’, ‘나를 잘 아는 사이라서’ 그런 연유는 혜암스님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 일이 바른 일이고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스승의 격려를 그 제자는 잊지 않고 있다. 

스님은 조주 무자(無子) 화두를 들 때는 ‘개에게 어찌 불성이 없다고 했는고’ 하지 않고 ‘무자 화두를 들고 있는 이 물건이 무엇인고’ 그렇게 공부했다고 한다. 

 혜암스님 삶과 수행      

‘공부하다 죽어라’ 실천한 선지식

혜암스님은 1920년 3월22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에서 부친 김원태와 모친 정계선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남영(金南榮)이다. 1933년 14세에 장성읍 성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리의 향숙(鄕塾)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또한 불교경전과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 1945년 26세에 일본으로 유학, 동서양의 종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어느날 선가의 책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읽고 크게 발심해 출가를 결심하고 귀국했다. 

1946년 해인사로 출가해 인곡(麟谷)스님을 은사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했다. 법명은 성관(性觀). 가야총림(현 해인총림 이전에 해인사에 있던 총림) 선원에서 수선안거 이래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선사 회상에서 일일일식과 장좌불와로 수행 이래 45하안거를 용맹정진했다. 1947년 문경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다. 1948년 해인사에서 상월(霜月)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1949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했다.

1951년 은사 인곡스님으로부터 혜암(慧菴)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때의 스승과 제자간의 법거량은 다음과 같다. 해인사 장경각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달마대사가 한쪽 신을 둘러메고 간 소식인고(如何是達磨隻履之消息).” 제자가 답했다. “한밤중에 해가 서쪽 봉우리에서 떠오릅니다(金烏夜半西峰出).” 또 스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유마힐이 침묵한 소식인고(如何是維摩杜口之消息).” “청산은 본래 청산이요, 백운은 본래 백운입니다(靑山自靑山 白雲自白雲).” 이에 스승 인곡스님은 “너도 또한 그러하고 나도 또한 그러하다(汝亦如是 吾亦如是)”하면서 법호를 내렸다. 인곡스님은 제자에게 “다만 한 가지 이 일을/ 고금에 전해주니/ 머리도 꼬리도 없으되/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느니라(只此一段事 古今傳與授 無頭亦無尾 分身千百億)”는 전법게를 전했다.

이후 범어사 금어선원, 안정사 천제굴, 설악산 오세암에서 3년 안거했다. 1954년 오대산 서대, 태백산 동암 등에서 3년 안거, 1957년 38세 때 오대산 사고암 토굴에서 용맹정진 중 심안(心眼)이 크게 열려 게송을 읊었다.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부수니/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迷則生滅心 悟來眞如性 迷悟俱打了 日出乾坤明).” 스님의 오도송이다. 

1961년 오대산 오대(五臺)를 시작으로 해인사 선원, 통도사 극락암 선원, 묘관음사 선원, 동화사 금당선원, 천축사 무문관 등에서 3년 안거 정진했다. 48세 때인 1967년 해인총림이 발족, 성철스님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고, 혜암스님이 선원 유나를 맡았다. 1968년 지리산 상무주암 안거정진에 이어 지리산 문수암, 인천 용화사, 해인총림 퇴설당에서 정진했다. 1970년 해인사 주지 소임을 맡았으며 1971년 문경 봉암사 백련암, 남해 용문사 선원에서 안거, 1973년 태백산 동암, 송광사 선원에서 안거했다. 

1976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안거 때였다. 운상선원을 중수하는데 먼지 속에서 작업 도중 홀연히 청색사자를 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게송으로 수기(授記)를 받았다. “때묻은 뾰쪽한 마음을 금강검으로 베어내서 연꽃을 비추어 보아 자비로써 중생을 섭화하여 보살피라(塵凸心金剛 照見蓮攝顧悲).”

1977년 해인총림 유나, 1978년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안거했다. 1979년 해인사 조사전에서 3년결사를 시작한 이후 해인총림 선원에서 1990년 71세까지 12년간 안거정진 했다. 1980년 해인총림 유나, 1981년 해인총림 수좌, 1985년 해인총림 부방장, 1987년 조계종 원로의원, 1991년 원로회의 부의장, 1993년 해인총림 제6대 방장 취임(~1996년), 1994년 원로회의 의장(~1999년), 1999년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됐다. 2001년 12월31일 오전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수 82세, 법랍 56년.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我身本非有 心亦無所住 鐵牛含月走 石獅大哮吼).” 스님의 임종게다. 문도들은 2007년 스님의 비를 세우고 법어집 <혜암대종사 법어집> ‘1권 상당법어’, ‘2권 대중법어’를 펴냈다.

 

도움말 : 원각스님(해인총림 방장), 여연스님(강진 백련사), 각안스님(보성 봉갑사).

자     료 : 혜암대종사 법어집 1, 2권(혜암문도회 편)

[불교신문3305호/2017년6월14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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