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란? ‘나’를 ‘남’과 온전히 공유하는 사람

 

생명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

세상에 대한 인문사회적 탐구

극단주의 벗어난 중도의 삶

8정도를 현실 속에 적용하자

‘불교’를 스스로 묻고 대화하자

인생에서 만난 모두를 사랑하자

붓다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과 세상, 뭇생명을 위해 기꺼이 나누고 함께 누리는 인간이다. 사진은 사회복지법인 승가원 스님과 불자들이 연등을 만들고 즐거워하는 모습.불교신문 자료사진

지금 여기 붓다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붓다처럼 걸림없는 자유와 평화의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역사 현장에서 이루어진 붓다의 실제 삶을 잘 파악하고 배워야 한다. 붓다는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한 모습으로 80평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2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붓다의 삶을 온전하게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기록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는 역사 현장에서 이루어진 그 분의 거룩한 삶을 회상하고, 따라 배울 수 있다. 

오늘날 붓다가 우리 곁에 계신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어린시절 붓다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돋보였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량사육 도살 처분되는 동물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성적경쟁·입시경쟁에 괴로워하는 친구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념, 종교, 민족, 국가를 이유로 다투고 싸우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을 지나 붓다는 눈부신 모습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한 의문을 한시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인문 사회적 소양도 높고, 종교에 대한 탐구력도 탁월했다. 천체물리학을 배워 우주를 탐구하거나, 세계의 실상을 알기 위해 사회과학을 배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붓다는 진리의 탐구와 실현을 위해 온 정성을 쏟은 사람이었다. 기성의 교육체계와 관계없이 인류가 쌓아올린 최고의 지식들을 끝없이 탐구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청년기 붓다 역시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했다. 그는 어떤 삶의 길을 선택했을까? 붓다는 매우 유능하고 뛰어난 역량을 가졌지만, 출세와 입신을 구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자본주의, 소비문명, 권력지향적인 경제나 정치 구조 안에서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2600년 전 청년 싯다르타가 왕자의 자리를 벗어던지고 출가사문의 길을 선택했듯이, 오늘 여기서도 이기적 탐욕과 욕망의 길을 떠났을 터이다. 그리고 기꺼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청년 붓다가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었다면 같은 수행자로서 더없는 기쁨이다. 하지만 꼭 그랬을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비록 출가수행자의 삶을 선택했더라도 붓다는 최소한 제도화된 종교 안에서 안주하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성의 모든 틀을 넘어서는 우주 보편의 길, 오래된 미래의 길을 열고자 했다. 

붓다는 종교인이 아니라 과학자나 철학자, 심지어 사업가의 길을, 어쩌면 생명을 살리고 기르는 농부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붓다는 그 길 위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실현하는 길을 끝없이 모색하였다. 온 몸을 던져 그 길을 걸어가면서, 참된 자유와 행복의 삶을 배우고 익혔다. 

결과적으로 볼 때 붓다는 양 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삶을 살았다. 2600년 전 붓다는 고행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양 극단을 몸소 체험하고 뛰어 넘어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오늘날 사회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해졌지만, 그래도 본질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제 종교만이 옳다고 믿는 극단적 배타주의, 현실을 떠난 진리추구나 진리가 없는 현실추구와 같은 것들이 오늘의 붓다가 뛰어넘은 양 극단이었을 것이다. 

중도의 길을 가는 인간 붓다, 오늘 그의 삶은 2600년 전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펼쳐진다. 저자거리를 거닐며, 길 위에서 민중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그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자유와 행복의 삶을 선물한다. 방황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인간은 자신이 행위하면 하는대로 즉시 뜻한 삶이 창조되는 위대한 창조주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를 위해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매우 주체적이고 위대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살도록 이끈다. 

“가난과 부유함, 고귀함과 귀천함,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은 신의 뜻이거나 전생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 따라 좌우된다. 해탈열반도 지금 여기에서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남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지 별천지의 신비한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 종교와 이념 같은 기성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대자유와 완전한 평화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과 세상, 뭇생명을 위해 기꺼이 나누고 함께 누리라. 그렇게 삶을 가꾸어가면 그가 누구이든 바로 본래붓다이다.” 

거룩하고 매력적인 붓다의 삶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공동체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그는 26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도식화된 규정이나 의무조항으로 제자들을 얽어매지 않는다. 제자들과 늘 자유롭게 묻고 답하고 대화하며 탁마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간혹 제자들이 잘못한 경우 엄하게 질책하지만, 그마저 늘 사랑의 몸짓으로 행했다. 그는 늘 스승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진리를 등불로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늘 깨어 스스로의 삶을 챙기면서, 민중을 위해 헌신하는 이 공동체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사람들은 붓다의 공동체에서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가꾸어갈 꿈을 꾸게 된다. 때로는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붓다를 찾는다. 붓다는 그들 또한 차별 없이 맞는다. 이들을 만날 때면 붓다는 종종 옛 사람들의 비유와 사례를 예로 들었다. 때로 잘못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비판보다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따뜻한 조언이었다. 붓다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였지만, 그들과 싸우거나 배척하지도 않았다. 어떤 이들이든 평등하게 환대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도왔다. 

그런 붓다에게도 민족의 분단과 전쟁의 긴 상흔은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옛날의 기억으로 으르렁대며 보수와 진보로 갈리어 싸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붓다는 현장에 나아가 사람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때로는 양측으로부터 비난 받기도 했지만, 붓다의 노력 덕에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해원상생의 길로 나아간다. 

붓다는 평생 길 위를 걷고 길 위에서 열반에 들었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생명이 안전하고 자유로운 세상, 그 삶이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설하고 걷고, 설하고 또 걸었다. 26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붓다의 제자들은 그의 삶을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정의했다. 진리를 구하는 붓다들의 삶은 시대와 공간의 차이를 넘어 늘 그러하였던가 보다. 

붓다는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도 보편타당한 진리의 실천자로 살았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이해 실현 검증되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복잡하고 관념적인 기존 종교사상의 장벽을 뛰어넘어 진리대로 사는 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 각자가 본래붓다로 살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하나? 2600년 전 붓다는 이러한 본래붓다의 삶을 팔정도라고 설명했다. 다른 모든 경전의 가르침들이 이에 대한 답변이긴 하지만, 8정도야말로 누구나 ‘붓다로 살게하는 대표적인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8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사유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위하고(正業), 바르게 삶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르게 깨어있고(正念), 바르게 평정하는 것(正定)이다. 8정도의 바름(正)은 중(中), 즉 중도를 말한다. 치우침 없이 있는 그대로의 길이다. 이 8정도를 개인의 삶에, 공동체의 삶에, 사회 활동에 실제 적용할 수 있도록 보다 더 깊고 풍부하게 설명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누구나 바로 붓다로 살 수 있는 길이 확립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실천행인 십바라밀, 보현행원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 붓다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라고 각자가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다. 그리고 함께 만나 대화하며 탁마해야 한다. ‘바보셋 문수지혜’의 마음으로 함께 노력한다면 현대사회에 걸맞은 해답이 찾아질 것이고, 그것은 미래의 붓다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 해답을 찾고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교신문3304호/2017년6월10일자] 

도법스님 조계종 화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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