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법정스님 지음, 최순희 사진/ 책읽는섬

근현대사 비극적 삶 새긴 최순희

그 아픔 묵묵히 지켜본 법정스님

두 인연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

 

불일암 사계와 소소한 풍경사진

스님의 유려한 글 만나 큰 감동

참된 수행자의 진한향기 느껴져

지난 1979년 한 여인이 법정스님이 머물고 있는 조계총림 송광사 산내암자인 불일암에 나타났다. 법정스님의 문도(門徒)들에게는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이 적지 않았고, 3년 전에 펴낸 수필집 <무소유>가 널리 읽히면서 팬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던 터였다. 하지만 여인은 달랐다. 아침나절에 찾아온 그녀는 법정스님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암자의 잔일을 돌보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산을 내려갔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서둘러 돌아가기를 되풀이했다.

스님은 여인을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멀리하지도 않았다. 문도들은 그녀가 궁금했지만 속가의 일을 따지는 것은 수행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저 나름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두 번째 계절이 찾아왔다. 1년이 지나고 2년을 넘기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쌓였다. 그사이 여인에 대해서 하나둘 드러났지만, 불일암에서 그녀는 여전히 무명인(無名人)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순희(1924~2015).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이화여대를 다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북으로 건너가 평양국립예술극장의 공훈배우로 활동하던 그녀는 한국전쟁 때 광주로 향하다가 국군의 반격으로 지리산에 숨어 들어가 남부군 문화공작대 문화부장이 됐다. 이태 작가의 <남부군>에 등장하는 최문희의 실존인물이 바로 그녀다. 이후 1952년 생포돼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남부군의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와 방송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건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한국전쟁 속에 유폐되어 있었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북에 두고 온 아들 때문에 그녀는 오랜 세월 고통스러운 시간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러던 가운데 1970년대 후반 법정스님이 잡지에 기고한 글을 접한 최순희는 장문의 편지를 쓴 뒤 무작정 불일암으로 향했고, 이후 그녀는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불일암에 올랐다. 십 수 년의 시간이 쌓이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불일암의 일부가 되어갔다. 불일암은 최순희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고, 법정스님은 거의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였다.

최순희는 불일암을 오르내린 지 15년째 되던 1994년 <불일암 사계>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소량만 만들어 시중에는 팔지 않고 지인들에게만 나누어준 비매품 도서였다. 이 책에는 자신의 삶을 더듬고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틈틈이 카메라에 담았던 불일암의 사계가 담겨 있다. 처음 불일암을 오를 때 오십대 중반이었던 나이는 어느덧 일흔 살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펴낸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불일암을 오르내리기 열다섯 해째입니다. 이젠 눈을 감아도 초입 풀섶에 이 계절 어떤 빛깔의 풀꽃들이 소담스레 피어 있을지도 환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정작 법정스님과 대화를 나눈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행여 수행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눈에 안 띄는 곳만 찾아 바람처럼, 그림자마냥 그렇게 다녀왔을 뿐입니다. 맑고 투명하게 살아가시는 법정스님의 면모를 이 작고 보잘것없는 사진집으로부터 접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

최순희 작가가 지난 1994년 펴낸 사진집 <불일암 사계>에 법정스님의 유려한 글을 담아 새롭게 펴낸 책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이 최근 출간돼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책에 수록된 불일암의 법정스님 의자와 세면대.

나이 칠십에 이르러 법정스님, 불일암과의 만남을 기념하며 사진집을 펴낸 이후 최순희와 불일암의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지리산 지킴이’였던 함태식 씨가 2002년에 출간한 책 <그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에 소개된 뒤 몇 차례 언론의 주목을 끈 이후 법정스님과 불일암에 누가 될까 발길이 뜸해졌을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그리고 최순희는 2015년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고, 2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사진집 <불일암의 사계>를 새롭게 꾸며 펴낸 책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이 세상에 나왔다. 깊이 있고 절제된 문장을 통해 일상과 자연 속에 담긴 깨달음을 전해 주는 법정스님의 글과 불일암을 오가며 그곳의 사계절과 소소한 풍경을 담은 최순희의 사진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묵묵히 지켜봐주고 조용히 곁에 머물렀던 두 사람의 마음이 빚은 책이다. 근현대사의 아픔을 삶의 생채기로 안고 살아야 했던 한 여인과 그 상처를 묵묵히 어루만져주었던 아름다운 만남이 소담한 사진과 법정스님의 유려한 글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이 책을 엮은 사단법인 말고 향기롭게는 최순희의 사진에 어울릴 만한 법정스님의 글을 짝을 지어 배치했다. <무소유>, <영혼의 母音>, <텅빈 충만>,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등 법정스님의 수필 속 글들은 따로 떼어놓으면 그대로 시가 된다. 소소한 일상과 자연 속의 지극히 당연한 이치들이 법정스님과 만나면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가 정지아 작가의 글을 덧붙였다. 부모가 최순희와 함께 지리산 남부군으로 활동했던 인연으로 오래전부터 최순희와 알고 지냈던 정지아 작가는 한 시대의 비극이 새겨진 아픈 삶을 짧지만 강렬한 필치로 그려내며 책의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삶을 아름답게 살아낸 사람의 향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법정스님의 입적 이후, 오히려 생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행적들이 스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드러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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