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서 만난 새터민들] “내가 선택하는 삶 살고 싶어… 그래서 마음편한 불교가 좋아”

통일하울림 동아리 활동하며

외로움 같이 어루만지며 학업

부처님 품에서 ‘꿈’ 키워가는 

한반도가 고향인 대학생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재학 중인 사미니 도현스님은 탈북 대학생 모임인 통일하울림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지난 22일 동국대 축제에서 북한음식체험전을 진행하고 있는 회원들을 만났다.

노동당 간부를 꿈꿨던 소녀였지만, 삶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육군 장교로 재직했지만 그녀와 상관없는 일로 강제 전역을 당해야 했다. 전역 후 당에서 지정한 직장에 나가지 않는다고 처벌을 받았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천신만고 끝에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때가 찌든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북한에서도 느끼지 못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 네일숍에서 일하면서 풍족하게 돈을 벌었다. 그러나 거금을 조선족에게 날리고 경찰을 피해 캐나다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북에서 살 때는 원하는 것을 위해 권력을 좇았고, 한국에서는 돈이 있어야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한 그녀는 산을 헤매다가, 2013년 서울 북한산 덕륜사에 발길이 닿았다.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참 행복해 보였어요. 권력도 재산도 본래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진짜 자유와 행복이 다가오네요.” 새터민 출가자 도현스님의 이야기다.  

북한의 과자, 사탕 등 여러 공산품과 이날 소개한 북한 음식(사진 아래).

동국대에는 현재 40여 명의 탈북 대학생이 있다. 새터민 대학생들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가느라 생활에 찌들어 있었다. 자신이 탈북자라는 것이 드러날까 전전긍긍, 얼굴마다 수심도 깊었다. 도현스님은 그들을 돕고 싶었다. 하나되어 울려 퍼지자는 의미로 ‘통일하울림’ 동아리를 만들었다. 탈북자와 통일에 관심있는 일반 학생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다른 대학교는 탈북자를 위해 동아리방도 마련해 주고, 담당교수를 지정해 새터민들이 대학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있어요. 또 교회에서 개별적으로 숙소를 제공하거나 생활비를 주기도 해요. 그런데 불교대학인 동국대에는 그런 제도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정각원에서 몇 번 간헐적인 지원을 받긴 했지만 생활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엔 많이 부족했어요.”

도현스님은 통일하울림 동아리를 만들고 매달 2차례 서울 불광사에서 정기법회를 보고 있다. 또 숙소가 없는 학생을 위해 덕륜사에 북한이탈주민쉼터를 만들고 숙소를 마련해 줬다. 몇몇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현재 5명이 생활비 지원도 받고 있다고 한다.

“힘들게 탈북을 해 외로움과 싸워가며, 고향에 남은 가족을 걱정하며 살고 있는 학생들이에요. 그들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대학이, 불교계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도현스님의 당부다.

경영학과에 다니는 김하나(가명) 씨는 북한에서 제법 살았던 집이었지만 “여러 사정이 겹쳐” 수년 전 탈북을 했다. 늘 가족이 처형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국에서 어려움은 늘 돈이지요. 공부하려면 책도 사야하고, 친구들 만나 밥도 먹어야 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알바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외롭잖아요.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나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김하나 씨는 통일하울림 활동을 하면서 “힘들 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겨 좋다”고 말한다. 나중에 패션 관련 사업을 하고 싶다는 김 씨는 올해 처음 선거에 참여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의무적 투표를 한 적은 있어요. 그냥 참여한 거지, 제게 선택권은 없었어요.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도 참 소중하다는 것을 대선을 통해 느꼈어요.” 

회계학과에 다니는 이민성(가명) 씨는 가족과 탈북을 했다. 함흥에서 힘든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북을 감행했다. 북한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 중이었다. 이 씨는 “하나원에서 처음 불교를 접했다. 대학에서 통일하울림을 통해 다시 불교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 씨도 “돈 문제가 가장 어렵다”고 토로했다. “남한은 누구를 만나려고 해도, 무슨 일을 하든지 돈이 필요하다”는 이 씨는 “마음 편히 살려고 힘들게 한국에 왔다. 그래서 용돈을 주는 개신교보다 마음이 편한 불교가 좋다.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며 웃음을 전했다.

단체사진을 찍자 “혹시 사진 어디 보도되나요?” 질문이 들어온다. “네. 사진 나가는 것이 불편한 분은 빠져도 되요.” 순간 스님과 여학생 한명만 남았다. 스님도 탈북 이후 어머니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던터라,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한국전쟁이 반발한지 67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남북간 대립은 진행형이다. 언제나 자유롭게 오가면서 ‘가족’이 함께 모여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불교신문3300호/2017년5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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