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앙가발이처럼 

주저앉을 리 없었다. 

생떼거리도 서슴지 않을 터인즉 

미국과 영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켜 

또 이겼다. 바야흐로 

하버드대학 출신인 일본 

가네코 겐타로가 나섰다. 

동창인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사바사바’로 영국의 묵인 하에 

조선 외교권을 넘겨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조선은…  

“집안은 다 무고하세요?”

우선 치레의 말을 해주었다.

“세상이 이리 시끄러워 무고할 것 있겠는가마는 별일은 없어.”

건성 나온 목소리였다.

“다행이네요.”

은엽인들 힘이 넘치는 소리가 나올 게제가 아니었다.

“한양으로 올라가 잘 지낸다고 하더니 웬일인가?”

찾아온 것 반갑지 않다는 속내가 보였다.

“전에 저와 혼인하려다 만 백상규 총각이 장가가서 잘 사는가 보려구요.”

“하이고 이 또 무슨 쇠통 빠진 소리다냐?”

매파 할머니가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총각 죽림리에 산다고 하던데 지금 집에 있나요?”

다 알고 발걸음 했지만 부러 딴전을 피웠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난 한다고 했는데, 중신이 잘못되어 혼쭐만 났어.” 

“혼쭐나다니요?”

“큼매, 납폐서와 혼수품까지 보내놓고 총각이 내빼버렸당께.”

“그럼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말도 마소. 신랑 될 총각 아범이 아들 찾아내라고 야단이 났네.”

혀에 침도 묻히지 않고 꾸며댄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총각이 중이 되었다는 소문만 떠돌고 통 나타나지 않어.”

“아니, 중이 되다니요?”

그 말은 은엽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혼인 날짜랑 정해놓고 한 번도 안 나타낭께 그러제.”

“지금까지 총각이 안 나타났단 말씀이 사실이에요?”

“여태 감감소식이여, 호랭이가 안 물어갔으면 중 된 것이 틀림없제.”

은엽은 잘못 찾아 왔다 싶었다. 한데 노파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전에도 교룡산 덕밀암에서 1년 나마 있다 왔다는 소문이 떠돈 것을 보면, 암, 중이 되었은께 그러제….”

“그럼 죽지는 않았다 그 말씀이군요.”

“죽을 총각이 아니제. 원채 똑똑해놔서….”

기껏 들은 말이 그것이었다. 은엽은 총각이 중이 되었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마음이 되더니 사무침으로 바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전봉준이 순창에서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갈 차비를 차렸다.

“아버지 저 한양으로 올라가렵니다.”

“아니 집에 있다 시집이나 갈 일이지 한양에 꿀단지 붙여놨냐?”

아버지는 듣고만 계셨고 어머니가 방방 뛰었다.

“어머니, 저 일본으로 유학 갈 거예요.”

그 말에 아버지 얼굴에 놀란 표정이 나타났다.

“유학을 가다니, 그 무슨 소리냐?”

“아버님도 아신지 모르시지만 유길준 선생과 삼촌이 아주 가까운 사이에요. 지난 갑신년 정변으로 취운정에 갇혀 지낼 때 삼촌 심부름으로 몇 번 갔다가 그 어른한테 일본말을 배우라고 해서 일본말을 배웠어요. 세상이 조용해지면 선생님은 미국으로 가시겠다면서, 전에 선생님이 다녔던 일본 게이오기주쿠 학교에 입학시켜줄 테니 열심히 공부나 하라고 해서요.”

“오매, 한양도 먼 곳인디 왜놈들 나라로 가겠단 말이냐?”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사내도 아닌 네가 그게 가능하겠느냐?”

“외국은 개화가 되어 공부하는데 남자여자 차별이 없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비용이 좀 들겠구나.”

“학비는 삼촌이 준다고 했어요.”

“돈이 상당히 들어갈 텐데, 삼촌이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럼 아버님께서도 도와주세요.”

“알았다. 삼촌과 잘 의논해봐라.”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은엽이를 왜놈 나라로 보낼 거예요?”

“배우는 데 여자남자가 따로 없다하지 않소.”

은엽은 아버지의 말씀을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다. 하나 일본 유학의 꿈을 접고 말았다. 왜냐하면, 조선은 일본이 보면 ‘모찌’고 청나라가 보면 ‘만두’였다. 동학농민군과 같은 내란이 일어나도 일본군대를 부르거나 청나라군대를 불러들여 가라앉혀야 했다. 그러다 일본과 청나라가 티격태격하더니 조선 땅에서 힘겨루기가 일어났다.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싸우면 전쟁 당사국인 일본이나 청나라 땅이 전쟁터가 되어야 하는데, 조선이 돈을 받고 싸움터를 빌려준 것도 아닌데, 조선이 전쟁터였다. 이 싸움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뱀이 개구리를 삼키듯 조선을 통째로 삼키려는 싸움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다. 일본이 친일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을 비롯한 급진적 개혁을 마구 실시했다. 일본은 랴오둥 반도까지 할양받아 대륙으로 치고 올라갈 발판을 마련했다. 이번에는 러시아가 가만있지 않았다. 가만가만 부는 바람이 큰 나무를 꺾는다더니,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쥐구멍이 소구멍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프랑스와 독일과 연합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일본이 꼬리를 내렸다.

이럴 때는 등거리외교가 필요한데, 이것이 기회다 싶은 민비 세력이 러시아 공사와 접촉, 조정이 친러쪽으로 기울어 일본을 배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일본도 가만있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군출신 미우라 고로를 일본공사로 보내 낭인들을 이끌고 경복궁 왕비 침실인 옥호루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살해해 석유를 뿌려 불살라 파묻은 사건이 일어났다. 

좌파 우파,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찢어 나누기를 좋아한 당파에 길들여진 친러파 이범진이 비밀리에 이완용, 이윤용,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합작으로 고종 ‘파천’에 나섰다. 고상하게 말하면 파천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잡아다 데려다놓고 친러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친일내각을 이끌었던 김홍집과 정병하가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게 타살되었다. 그 바람에 내부대신이었던 유길준은 일본 군영으로 피신, 망명해 버렸다. 그 바람에 은엽의 일본유학 꿈은 갈림길이 되었다. 열화와 같은 신학문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는 삼촌이 “유길준 동지만 있어야 일본유학이냐?” 일본으로 가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배울 수 있게 뒷받침해주겠다고 했으나 은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꼭 일본에만 가야 공부이겠습니까? 이화학당에나 가렵니다.”

그래서 병술(1886)년에 설립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일찍 들어와 공부할 걸….

어느 날, 이화학당에서 돌아오니 삼촌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점잖은 사람은 입에 담기 어려운 ‘개똥참외’라는 말을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개똥참외라니요?”

“지금 나라 형편이 그렇다.”

조선의 땅속까지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것이었다. 

“뱀은 쥐나 개구리를 입에 물면 통째로 삼키지. 한데 포유류는 달라, 여우가 산토끼를 잡으면 승냥이나 호랑이가 야?, 안 뒈지려면 저리 비켜! 그러고는 뺏어 먹거든. 인간은 또 다르지.”

“어떻게 다르나요?”

“돼지로 예를 들어보자. 돼지고기 목 부분을 목심, 등 부분을 등심, 등심 밑에 안심, 앞다리 부분은 사태살, 배 부분은 삼겹살, 뒷다리 부분은 볼기살, 발은 족발….” 꼭 푸줏간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졸졸 꿰었다.

“언제 그렇게 돼지고기 연구를 하셨나요?”

“네가 언젠가 삽살개가 쥐를 잡아 안 먹고 가져오더란 말을 했었지?”

“네.”

“지금 조선은 통째로 잡아놓은 돼지고기 신세다. 자, 들어 봐라! 돼지고기 목심이랄 수 있는 종성, 경성 광산 채굴권은 러시아가, 앞다리 사태살이랄 수 있는 운산 광산권은 미국이, 등심격인 금성 광산채굴권은 독일, 일본 놈들은 여우라 꾀가 놀놀해 먼 장래를 보고 조선 내장을 겨누고 있다. 한양을 중심으로 경부, 경의, 경인 철도부설권, 한양 전차부설권, 돼지 삼겹살격인 직산 광산채굴권을 차지하고, 러시아는 또 뒷다리 사태살격인 목포 고하도 섬을 아예 팔라는 거야.”

“호호호, 조선은 그럼 족발만 남습니까?”

“웃을 일이 아니다. 값나간 데는 땅속까지 모두 도장을 찍어 놨다.”

듣고 보니 과연 웃을 일이 아니었다. 살쾡이, 호랑이, 늑대, 곰, 여우같은 나라들이 눈을 부릅뜨고 한반도를 둘러싸고는 한 볼퉁이씩 먹겠다고 달려든 꼴이었다. 

판세가 그리 되었다고 일본이 앙가발이처럼 주저앉을 리 없었다. 생떼거리도 서슴지 않을 터인즉, 미국과 영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켜 또 이겼다. 바야흐로 하버드대학 출신인 일본 가네코 겐타로가 나섰다. 같은 하버드대학 동창인 미국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과 ‘사바사바’로 영국의 묵인 하에 조선 외교권을 넘겨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조선은 외통수에 걸려 외교권도 없는 빈껍데기뿐이었다.

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불교신문3300호/2017년5월27일]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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