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은엽은 

‘백상규’라는 이름만 외어 

아무도 모르게

번암 죽림리로 찾아갔다. 

사람들이 신식 머리를 한 

은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에 한눈팔지 않고 

중매를 선 할머니 댁으로 갔다. 

매파 할머니는 그동안 많이 늙어 

반백이 흰머리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한참 쳐다보더니 

은엽을 알아보았다.

“아니 장수

조 대감님 따님 아닌겨?” 

은엽이 여여원 건재창고 앞에서 건강(乾薑)을 꺼내보니, 습기가 약간 있는 것 같아 햇볕에 널고 있었다. 그 무렵 은엽의 의술은 대치선생을 대신에 처방전을 낼 만큼 수련이 끝나 있었다. 한데 삽살개가 어디서 잡았는지 쥐를 물고 나타나 은엽 앞에 놓았다. 

“쯧쯔! 네가 조병갑이 보다 천 배 낫다.”

듣자하니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군수 조병갑 이름이 소문 한 가운데 있었다. 두견새 목에 피를 내어 먹듯 탐관오리들 탐학에 백성들이 눈물로 살아온 조선, 망할 망자가 가까워지니 더더욱 조정에 거금의 뇌물을 주고 군수가 되어 내려와 한 밑천을 뽑으려는 가렴주구가 한양까지 요동쳤다. 비전박토에 세금 물린 것은 조선조 지방 수령이면 누구나 다 해온 짓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고부는 원래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호박이 넝쿨째 굴러올 판인즉, 군수로 내려오자마자 초라니 소고 흔들듯 놈의 물탐(物貪)이 바닷물을 비웠으면 비웠지 주머니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석보 물세로 농민들 등짝이 찌그러들었고, 돈푼 있는 사람이다 싶으면 도나 개나 잡아들여, ‘너 어제 오입질 했지?’ ‘너 어제 술 먹고 이웃 아낙네 덮쳤잖아?’ ‘네놈이 불효자라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다!’ 꼬투리를 잡아 등이 휠 만큼 벌금을 매겨 돈을 뜯어냈다. 그 재미로 군수노릇을 하다 고부지방 동학접주 전봉준한테 걸렸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려도 듣지 않자, 전봉준이 동학농민군 1000여명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했다.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부터 한 뒤, 곳간 문을 열어 빼앗긴 세곡을 도로 농민들에게 돌려주자 조병갑이 전주로 도망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 안이 전쟁이었다. 중앙이나 지방이나 양반이란 작자들이 깨알만한 권력만 쥐면 못난 백성 쌀독을 긁어가 눈물로 골짜기를 만들어 살아온 것이 조선조 고종 때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저녁에 여여원에서 돌아온 은엽은 삼촌하고 마주앉아 삽살개가 쥐를 잡아 물고 왔기에 조병갑 보다 나아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큰소리로 웃었다.

“그것이 나라의 망징패조(亡徵敗兆) 아니겠느냐?”

“그나저나 고부에서 농민군이 한양으로 올라온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고부뿐이겠느냐? 충청도에도 동학군이 일어나 관군이 쫓기고 나라 창고가 다 털리고 있다.”

“그럼 양반들 곳간도 털리겠네요?”

“관아가 무너지는 판에 양반들 곳간 그까짓 게 문제냐?”

망징패조의 1등공신은 가렴주구 관료, 2등공신은 잇속만 챙기는 졸부, 3등공신은 문벌 좀 있다고 거들먹거린 양반, 4등공신은 백성들을 깔보는 유생들, 그들을 표적으로 삼고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듯했다.

“그러면 저도 얼른 장수에 내려가 봐야겠네요.”

“왜? 아버지 어머니가 걱정이냐?”

“세상이 뒤집히면 우리 집이라고 절간에 쇠 채운 것 같겠어요?”

삼촌은 정읍, 태인, 김제, 부안, 남원, 전주까지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당했지만 장수가 점령당했다는 말은 못 들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남원, 전주가 점령됐으면 장수가 몇 발짝이나 됩니까?”

은엽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소리로 “큰일 났네.” 그러면서 삼촌을 쳐다보았다.

“저 내일 내려가 보고 올게요.”

“뒷집 마당 벌어진 데 솔뿌리 걱정한다더니….”

꼼짝 말고 가만히 엎드려 있으라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이 전쟁 한가운데 계신데 가슴에서 불이 꺼져요?”

“지금 시국 형편이 단 꿀에 개미 덤비듯 하면 안 될 때다.”

“선 머시매 나무꾼 행색으로 갈게요.”

삼촌이 한참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알았다. 효성은 그만큼 갸륵하니….” 

이튿날 행랑아범이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왔다.     

“어르신….”

삼촌은 개화가 되어 행랑아범한테도 어르신이라는 존칭을 썼다.

“은엽이를 데리고 장수 제 형님 댁에 좀 다녀오십시오. 지금 남쪽이 시끄러우니, 진천에서 옥천으로 내려가 무주에서 산길로 장수로 가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리.”

“보은은 최제우 신원을 요구하는 최시형의 동학군이 집결해 있다는 말이 들리오. 그 점 유념해 보은 쪽으로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예, 알겠습니다. 나리.”

은엽이 한밤중에 손을 내밀듯 불쑥 나타나자 아버지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한데 아버지는 은엽의 행색을 보고 행낭아범 인사를 받더니 낌새를 알아차린 듯 담뱃대를 입에 문 채 껄껄 웃었다.

“수고했네.”

행낭아범을 사랑으로 들여보냈다.

하나 어머니는 달랐다.

“이것아! 시집도 안 간 규수 행색이 게 뭐냐?”

한숨이 땅이 꺼지듯 했다.

“허허! 임자는 지금 시국이 상것들 세상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시는가?”

아버지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도 그렇지요. 양반집 규수가 저 행색이 말이나 되요?”

쏟아지는 눈물을 못 참고 옷고름을 눈으로 가져갔다.

“걱정 마 엄마. 부러 이러고 왔어.”

“한양에서 신문물을 받아들였으니 임자하고는 생각이 다를 게요. 암, 다르고말고….”

그러고 아버지는 사랑으로 가버렸다.

은엽은 몸을 씻고 전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는 한양에서처럼 두 갈래로 땋아 앞가슴으로 내렸다. 이튿날 색다른 은엽의 머리 모습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

“머리가 어찌 두 갈래냐?”

어머니가 물었다.

“그것이 신식 머리다냐?”

마땅찮다는 목소리였다.

“양 갈래머리는 옛날에도 있었어, 엄마.”

“시끄럽다. 그러고 다니면 누가 널 규수로 보겠냐?”

한양은 단발령이 내려 젊은 남정네들은 하이칼라를 하고, 처녀들 머리도 예전하고 많이 달랐다. 그러함에도 장수와 같은 산골로 내려오니 유속(儒俗)을 생명처럼 여긴 사람들이 상투를 자르지 않고 뻗대는 이들이 많았다.

은엽이 한양에서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갑내기 처녀들은 시집을 가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이웃에 사는 어머니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워매! 얼굴이 박꽃처럼 훤허네.”

“신랑이랑 같이 왔능겨?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에 구멍이 뚫린다더니, 시집 안간 줄 뻔히 알면서도 찧고 까불어댔다.

“무슨 호박이라고 혼자 늙을까?”

“만났는겨?”

전에 마루에 방물을 펴놓고 사라진 방물장수를 염두에 두고 눈치를 보려는 것 같았다. 그 후속편이 은엽의 입에서 나오지 않으면 틀림없이 아낙들이 창작을 해댈 판이었다. 하나 방물장수 문제는 은엽이 한양에 가 있는 동안 이미 신원이 밝혀져 있었다. 남원군 번암면 죽림리에 사는, 백상규 총각이라는 것, 그 말은 듣고 은엽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혼인을 안 하려면 처음부터 싫다고 할 일이지 날짜까지 받아 놓고 무슨 심보로 혼사를 깼는가. 제까짓 게 잘났으면 얼마나 잘 났기에 풍양조씨 양반 얼굴에 숯검정을 칠했냐싶어 가슴속에서 방망이가 치솟듯 했다. 하나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어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 총각은 장가가서 잘 산대요?”

“행방불명 됐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남 시집 못 가게 해놓고 행방불명? 정녕 그놈이 풀 먹은 미친개 아닌가. 사주단자까지 보내놓고 방물장수로 꾸미고 찾아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팔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렇게 치부하고 속을 가라앉히려 해도 무언가 찜찜했다. 놈도 양반이라고 글 줄 읽었을 터인즉, 어찌 사과나무에 배 열린 짓을 했을까. 여전히 수수깨끼는 풀리지 않았다.

이튿날 은엽은 백상규라는 이름만 외어 아무도 모르게 번암 죽림리로 찾아갔다. 사람들이 신식 머리를 한 은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에 한눈팔지 않고 중매를 선 물집 할머니 댁으로 갔다. 매파 할머니는 그동안 많이 늙어 반백이 흰머리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한참 쳐다보더니 은엽을 알아보았다.

“아니 장수 조대감님 따님 아닌겨?”

“네?,”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상에?, 어서 좀 들어와 앉아.”

친절히 맞아주었다.

“한양으로 갔다더니 얼굴이 훤해졌네.”  

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불교신문3298호/2017년5월20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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