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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금강경] <19> 제13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부처님처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해탈해야
  •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 승인 2017.05.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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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수행하여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반야바라밀, 최고의 보시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은 무엇이라 해야 알맞으며, 저희들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 되니, 이 이름으로써 그대들은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여, 부처가 설명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표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여래가 진리를 설명한 일이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진리를 설명한 일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삼천 대천 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모든 티끌이라 함은 여래가 티끌이 아닌 것을 말한 것이며, 그 표현이 티끌인 것이니라. 여래가 설명한 세계도 세계가 아닌 것을 말함이며, 그 표현이 세계인 것이니라.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서른두 가지 훌륭한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서른두 가지 훌륭한 모습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명한 서른두 가지 훌륭한 모습이란 곧 이것이 훌륭한 모습 아닌 것을 말씀하심이며, 그 표현이 서른두 가지 훌륭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만일 자질이 뛰어나 남자나 여인이 있어서,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목숨으로써 보시하고,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에서 사구게 등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설명한다면 이 사람의 복이 (앞의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니라.”

제13분은 부처님처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사람들을 깨닫게 하라는 내용이다.

먼저 경(經)의 제목을 여쭌 것은 <금강경>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씀해 달라는 뜻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금강반야바라밀’ 즉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어떤 것이라도 능히 물리치는 우리네 본래의 청정한 성품으로부터 비롯되는 초월적 지혜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 <금강경>의 특징적인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부처가 설명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표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모든 경전은 반야바라밀과 통한다. 그럼 경을 모두 기억하고 분석하여 이해하면 반야바라밀이 될까? 그것은 연구의 성과일 뿐 진짜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근본을 잊어버리고 수단이나 작은 성과 위주로 수행하는 것은, 나무의 뿌리는 무시하고 가지나 잎에 물을 주거나 거름을 주며 가꾸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불교방송에서 강의를 하던 1991년부터 현재까지 나는 수많은 법회에서 우리나라 교육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청소년들은 상자속의 삶을 살고 있다. 생활 및 교육공간이 모두 규격화된 상자를 옮겨 다니듯 한다. 교육의 내용도 시험을 위주로 한 지식인데, 지식이란 과거의 정보를 상자처럼 고정시킨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정해진 틀(상자)인 시험을 누가 잘 통과하느냐의 경쟁이다. 이렇게 교육받은 청소년들이 어른이 된다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각이나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미 굳어진 지식의 틀에 갇힌 사람은 자기만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어렵다. 자유롭게 풀어놓고 뛰어놀게 하면, 직접 부딪치면서 분석하고 추리하며 통합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이다. 이렇게 성장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맞을 것이다. 

‘훌륭한 모습’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관념화되고 도식화된 불상만이 아니다. 이미 지적 해석을 끝내버린 교학도 거기에 포함된다. 일부 학자들은 기도하는 수행법을 두고 기복불교(祈福佛敎)라고 무시한다. 본인이 목숨 걸고 기도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생계와 명예(福)를 동시에 구하기(祈) 위해 관념화되고 도식화된 불교교학을 선택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해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복이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분명히 알고 수행하여 해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혜로 다른 사람을 해탈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반야바라밀이며, ‘훌륭한 모습’이며, 가장 뛰어난 보시이다.

[불교신문3298호/2017년5월20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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