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속 불법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낸 선지식

광덕스님은 불교를 바로 알고 배운 뒤 이를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보낸 현대의 선지식이다.

부처님 법 깨닫기에 혼신 다한 뒤

정법 실천하고 펴는데 심혈 기울여

종헌 종법 제정 깊숙이 관여하며

정화 불사 후 조계종단 기틀 다져 

불광사 통한 ‘불광운동’ 전개하며

한국불교 새 모델과 희망 이끌어

금하당 광덕대선사(1927~1999)는 불교를 바로 알고 배운 대로 실천하고, 알고 있는 부처님 법을 바르게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보낸 현대의 선지식이다. 

출가 이후 부처님 법을 배우고 깨닫기에 혼신을 다 했으며 정법을 실천하고 현대인에게 부처님 법을 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불교정화 이후 새롭게 출발한 조계종단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기틀을 가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그리고 원융한 행정능력을 발휘했다. 종헌·종법의 입안과 종책 수립, 그 수행에 종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의 비전 제시에 빼어난 안목을 지니고 종단을 앞장서 이끌었다. 

출가수행자에게는 독신과 채식 그리고 청정한 지계정신을 늘상 강조했으며 스스로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청정비구로서의 삶을 살았다. 산중불교를 도심불교로 끌어냈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경전속에 묻어두지만 않고 삶의 현장으로 끌어냈다.

광덕스님의 일생은 한마디로 순수불교의 탐구와 일상생활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 그리고 현대인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일깨우고 널리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인 점에서 후학들에게 큰 울림을 남기고 있다. 스님의 한 평생은 법상에서의 법문이나 일상에서의 언행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한결같은 삶이었다. 

이러한 스님의 평생수행은 순수불교운동·반야바라밀 불광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바탕으로한 구국구세(救國救世)의 방향을 제시한데서 당신의 한 평생의 대작불사를 보게 된다. 

광덕스님은 1927년 4월7일(음력 3월3일)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내리에서 부친인 제주 고씨 준학(高準學)과 모친인 김동랑(金東娘)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고병완(高秉完)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효성스러웠다. 항상 조용하고 착하고 준수한 소년이었으나 병약했다. 노래도 곧잘 했고 작문을 잘 해서 상도 받았다. 스님이 스무살이 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스님은 독학으로 한국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1947년 한관섭((韓觀燮, 법명 대용, 1909~1981)선생이 서울 장충동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4년제 정규 야간대학이었다. 스님은 이 대학 법정학부에 입학했는데 영어, 독일어를 잘 했다고 한다. 대용 거사는 효봉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은 돈독한 불자였으며 한암·탄허·구산스님과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1950년 스님은 대학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부산 범어사에 입산했다. 건강 문제도 있고 세속 학문의 한계에 대한 실망도 한 원인이었다. 광덕스님은 후일 “가끔 출가 동기를 묻는데 제게는 특별한 동기가 없습니다. 건강상 문제, 선생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선방을 구경 갔다가 거기서 훌륭하신 지도자를 만나고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 인간이 범범한 인간이 아닌,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문을 한번 열어봐야겠다. 물러설 수 없다 해서 그 생활을 한 것이 3년, 30년, 40년이 되어 갑니다.”(1986년 1월6일 KBS 2TV 대담)

범어사에 입산한 스님은 동산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후 범어사 청풍당, 관음전, 지장전, 미륵암, 금강암, 함안 장춘사, 기장 죽도, 삼천포 등지에서 수행정진했다. 1952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1953년 신소천스님의 ‘금강경 독송 구국 원력대’에 참여, 전국을 순회했다. 1954년 동래 온천장 금정사에서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 동산스님을 만났을 때 스승이 던진 한마디, “꿈 속에 있을 때는 꿈꾸는 거라고 하자. 생각이 있을 때는 생각이 너라고 하자.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너는 뭐냐? 가져 와 봐라”는 이 한마디의 화두가 스승을 만난 후 치열한 정진을 한 4년 여에 툭 터진 것이다. ‘부처님, 한 마음, 생명, 마하반야바라밀’. 광덕스님의 오도를 한 묶음으로 풀어낸 말이다. 이 넷이 광덕스님의 사상을 구축하는 4대 지주(四大 支柱)이자 강요(綱要)이다.

1956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같은해 대각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다. 1959년 범어사 선원에서 일타스님을 비롯한 몇몇 도반과 함께 선서 <벽암록>, <선문촬요>, <선문염송>, <선관책진> 등을 번역해 출간했다. 1962년 조계종 서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종법 등 각종 법령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1963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초대 지도법사, 1965년 조계종 기획국장(서무국장 겸임), 같은해 봉은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건립했다. 이 수도원은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한국청년불교사에 길이 남을 역사이자 종단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1968년 <보현행원품>을 출간하는 등 스님은 당신의 포부를 드넓게 펴는 수십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1969년 조계종 교무부장, 1971년 총무부장, 총무원장 직무대행(청담스님 열반 시), 1974년 대각회 이사장, 같은해 중앙종회 부회장을 맡았다. 이후 스님은 종단 일선에서 물러나 독자적 행보를 걷는다. 1974년 순수불교를 널리 펴는 포교지 월간 <불광>을 창간, 발행인을 맡았다. 1975년 불광법회를 창립했고 1982년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불광사를 준공했다. 1992년 4월 창작 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을 공연했다. 이 공연은 헨델의 메시아 공연 못지않은 불교계의 대작불사로 자리매김했다. 1996년 또 한번의 대작 공연으로 국악교성곡 ‘부모은중송’을 선보였다.

반야바라밀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이를 널리 전파한 불광운동. 그리고 보현행원의 실천과 구국구세의 방향타를 바로잡은 광덕스님의 치열한 구도열정. 몸을 돌보지 않은 불법 전파의 한 생은 1999년 2월27일 오후1시40분 조용히 막을 내렸다.

“울려서 법계를 진동하여 철위산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겁전(劫前) 봄소식이 겁후(劫後)에 찬란해라/ 일찍이 형상으로 몰형상을 떨쳤으니/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스님이 남긴 열반송이다.

 ■ 광덕스님의 수행일화

“수행자는 춥고 배곯아야 정진 잘 돼”

제자들은 스승인 광덕스님을 기려 법어집을 10권 전집으로 엮어 내기도 하고 <시봉일기>라는 이름으로 10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광덕스님이 이승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도 여전히 스님의 법향을 기리고 스님의 말씀을 찾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를 곱씹어 본다.

스승이 계실 때 스승 곁에서 당신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때 그 말씀을 깊이 새겨듣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오늘에 와서야 당신의 말씀이 새삼 되새겨진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제자는 어느 제자든 스승을 이렇게 추모하는 것일까? 

크고 큰 원력을 지니고 그 원력의 실현에 아픈 몸도 잊고 투철히 매진한 스승을 이제야 다시 알게 된 제자들의 회한을 누가 알랴. 고(故) 이기영 박사는 광덕스님을 일러 “한국불교의 모델이요 희망”이라고 했다. 한국불교에 큰 물줄기를 트고 현대사회에 걸맞는 포교의 전범(典範)을 제시한 광덕스님. 당신의 일생은 진정 이 시대 수행자의 사표이다.

“스승께서는 남 앞에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제자의 회고다. “수행자는 좋은 옷 입으면 안 된다”하시면서 남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도록 다림질 안 해도 되는 옷을 입고 다니신 스님. 

잠시라도 쉬지 않고 책을 손에서 떼지 않던 스님. 경전을 보지 않으면 ‘부처님께 죄짓는 것 같다’던 스님이다. 경전을 소중히 함에는 추상같은 엄격함을 드러냈다. 경전을 맨바닥에 놓거나 경전 위에 다른 책이 놓이면 불호령을 내렸다. 또한 “중이 한가롭게 차 끓여 마시면 안 된다”고 한 당신의 말씀을 오늘의 불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 평생 병과 더불어 병을 벗 삼아 산 스님. 스님은 공양 때가 되면 ‘밥 먹여 줄까’했다. 마치 자가용에 기름이 떨어지면 ‘기름 넣고 가자’는 식이었다.

봉은사 시절, 1960년대 후반이었다. 나라도 가정도 모두 가난에 찌들어 살 때였다. 대중 스님들의 조석 공양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으며 겨울철 연탄 한 장도 귀하기 그지없을 때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광덕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의 구도열은 한겨울 찬바람도 녹일 정도로 치열했다. ‘수행인은 춥고 배를 곯아야 정진이 더 잘 된다’ ‘중이 등 따습고 배 부르면 도심(道心)은 달아난다’는 말은 이제는 옛말이던가. 광덕스님이 다시 와서는 요즘 수행자의 호사를 뭐라고 질타할까.

땔감과 쌀이 없을 때 절 옆 봉은보육원에서 빌었다가 어쩌다 생기면 도로 갚아주면서 살던 봉은사 시절. 세월의 흐름에 봉은사는 ‘뚝섬 강나루 건너 봉은사’가 아니라 ‘서울의 중심 강남 봉은사’로 변했다.

 

도움말 : 흥교스님(창원 성주사 회주), 지정스님(함안 봉불사), 지환스님(동화사 유나), 지홍스님(조계종 포교원장), 송암스님(안성 도피안사)

자     료 : <광덕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김재영 편저)>, <광덕스님 전집(불광출판사)>, <광덕스님 시봉일기(도서출판 도피안사)> 

[불교신문3297호/2017년5월17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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