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대통령선거 특집] 역대 대통령과 불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대통령(大統領)은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서 나라의 향방을 바꾸고 때로는 운명을 좌우했다. 불교계의 진로 역시 그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안타깝게 꺾이기도 했고 훈풍을 맞기도 했다. 오는 5월9일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역대 주요 대통령들과 불교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의원내각제 체제의 윤보선 제4대 대통령과 사실상 권한대행이었던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은 제외했다. 사전투표는 오늘(5월4일) 이미 시작됐다.


 “일인(日人)들이 저의 소위 불교라는 것을 한국에 전파해서 우리 불교에서 하지 않는 모든 일을 행할 적에 … 이 불교도 당초에 우리나라에서 배워다가 형식은 우리를 모범하고 생활제도는 우리와 절대 반대로 되는 것으로 행해 오던 것으로 한인들에게 시행하게 만들어서 한국의 고상한 불도를 다 말살시켜 놓으려 한 것이다.” 1954년 5월 이승만 초대~3대 대통령이 발표한 불교정화 유시(諭示)의 일부다. 일제의 잔재인 대처승이 한국불교의 법통을 망치고 있으니 하루빨리 내쫓아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승만의 유시는 무려 7차례에 걸쳐 내려졌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불교정화운동이라는 역사적 격변을 만들었다.
 

 대통령의 지지가 지지부진하던 정화의 활로를 열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승만은 철저한 개신교인이었다.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국시로 내세웠다. △크리스마스의 국경일 지정 △형목(刑牧) 제도 신설을 통한 교도소 교화사업의 기독교 전담 △서울중앙방송을 통한 공식적인 선교 △일요일의 공휴일 추진 등이 비근한 정책적 사례다. 이랬던 그가 뜬금없이 불교정화를 지시한 것을 두고 뒷말이 많다. ‘불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분열 획책’ 또는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물 타기’였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화를 진두지휘한 제2대 종정 청담스님의 회고록인 ‘나의 입산 50년’에 따르면 이승만의 깊은 내면에는 불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4년 8월 유시에 대한 감사를 표하려고 경무대를 방문한 청담스님 일행에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내가 40년을 미국에서 살았고 기독교를 믿어서 교회에 간다. 그러나 역시 고국에 돌아와서 절을 찾아가니까,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절간에 갔었던 생각이 절로 나며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신라, 고려 때처럼 우리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다시 국민의 정신도 일깨워야겠다.…내가 대통령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불교를 바로 잡아야 해.” 그의 모친은 서울 삼각산 문수사에서 100일기도를 해서 그를 낳았다는 전언이다. 정화의 정당성을 외치며 대법원에서 할복을 감행했던 원로의원 월탄스님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일본 경찰에 쫓겨 피신한 곳도 문수사였다”고 증언했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얻은 박정희 제5~9대 대통령 역시 정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비구승이 통합종단 출범을 승인했다. 불교는 청정한 독신승의 교단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다. 특히 독실한 불자였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자문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육 여사는 청담스님에게서 대덕화(大德華)라는 법명을 받고 매월 한 차례 서울 도선사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청담스님의 상좌인 도선사 문장 혜성스님은 “영부인이라는 상(相)을 일절 내지 않는 조용하고 정숙한 불자였다”고 술회했다.
 

 박정희 대통령 본인은 불교에 대한 애정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1960년대 후반 본지의 전신인 <대한불교>에 신년 휘호를 자주 써줬다. 그가 제정한 불교재산관리법은 ‘사찰 재산 망실 방지’와 ‘종단의 국가 예속 심화’라는 명암을 동시에 갖는다. 관광문화자원으로 삼기 위해 경주 불국사를 국가 차원에서 중창할 것을 지시한 점도 불교계에는 치적일 수 있겠다. 반면 전국 대다수의 명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불사를 규제한 것은 흠결이다. 강남권 개발을 명분으로 한 봉은사 땅 헐값 매각을 주도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11-12대 대통령 ‘전두환’은 교계가 잊기 어려운 이름이다. 현대 한국불교 최대 수난사인 1980년 ‘10.27 법난’의 장본인인 탓이다. 그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3만 명의 군과 경찰을 투입해 전국 5000여 개의 사찰에 난입해 2000여 명의 스님들을 연행해 고문하는 만행을 벌였다. 최근 내놓은 회고록에서는 자신은 사건 자체를 몰랐다면서 “그 시절 불교계는 각 종단 간의 다툼, 종단 내의 분규, 일부 승려들의 탈선행위, 폭력배 등 무자격 승려들의 행패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군부에 협조하지 않았던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다. 스님들에게는 결코 용서하기 어려운 악인이겠으나, 절대 권력을 잃어버리고 초라해진 그를 받아준 것은 스님들이었다. ‘5공 청산’이 국민적 의제로 떠올라 궁지에 몰리자 1988년부터 3년간 인제 백담사에 은둔하며 참회하는 행보를 취했다.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불자임을 밝혔던 인물이다. 서의현 전 총무원장의 지배력 아래 있던 대구 동화사 신도였다. 스님들에게서 ‘모든 것을 다 주어라. 그러면 부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법문을 듣고 매우 감명했다고 한다. 교계를 겨냥해 대선 공약을 최초로 내세웠고 지키기도 했다(불교방송국 설립 허가). 친밀했던 서의현 전 총무원장을 도와 종단의 이런저런 불사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원죄가 있었다. 2011년 8월 발간한 회고록에서 “10.27 법난을 자신이 지시했다”고 털어놓아 파문이 일기도 했다.
 

 김영삼 제14대 대통령만큼 불자들과 애증의 관계인 통치자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많이 도와줬으나 상처도 많이 줬다. 1992년 대선 후보 당시 불교계 민심을 얻기 위해 불교방송 지방방송국 설립 허가, 수도권지역 불교종합병원과 불교회관 설립 지원, 불교관련법 독소조항 개정 또는 폐지, 중앙승가대학의 정식인가 대학 승격 등 7대 불교공약을 제시했고 누구보다 공약 이행도가 높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개신교 장로 출신이라는 체질은 바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종교 편향적 인사와 개신교 강요, 훼불 사건에 대한 미온 대처 등으로 인해 형평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오죽하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이후 ‘청와대에 있는 석불을 치워버린 과보’라는 소문이 돌자 종단 큰스님들을 초청해 제자리에 있다고 확인시켜주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은 인욕(忍辱)의 화신다운 면모를 보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특정종교에 편향 없는 자세로 불교계 문제해결’이라는 대선 공약을 지키려 애썼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건립비용 지원, 팔만대장경 한글화 및 전산화 지원 등 외적인 지원과 전통사찰보존법, 문화재보호법등 불교관련법 제?개정을 추진한 것이 긍정적으로 비춰진다. 무엇보다 ‘햇볕정책’에 기초한 남북불교교류의 활성화가 핵심이다. 2000년 불교신문 창간 40주년을 맞아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청와대에서의 인터뷰를 수락하기도 했다.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은 사찰에서 고시공부를 했다. 대통령으로서 불교에 해준 것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북한산 관통 서울외곽 순환고속도로, 부산고속철도 노선 천성산·금정산 관통사업의 백지화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데면데면했던 관계는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거대한 화해와 추모로 승화했다. 2009년 서거 직후 지역감정과 권위주의 해소에 기여하고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던 생전의 면모는 불자들에게도 큰 감동으로 살아 돌아왔다. 당시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교구본사에 분향소 설치를 지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49재도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사찰 정토원에서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악연이다. ‘장로대통령’이란 힐난을 감수하며 취임 초기부터 노골적인 종교편향정책을 전개했다.  지리정보시스템에서 사찰을 삭제했고 측근 공직자들의 개신교 두둔 발언이 잇따랐다. 종립학교에서 불교문화재가 훼손되고 경찰청장은 특정 종교 선교 활동을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포스터를 전국 경찰서에 붙였다. 서울의 어느 구청장은 교회 신자만 인턴으로 채용했다. 불교에 대한 무례는 결국 경찰이 총무원장 스님의 차량을 검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08년 8월27일 서울시청광장에 20만 불자가 운집해 정부를 규탄한 범불교도대회가 거행된 이유다.
 

 박근혜 제18대 대통령은 어머니 육 여사의 영향을 받아 불자는 아니었지만 불교와 가까웠다. 진제 종정예하로부터 ‘대자행(大慈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대선을 앞두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선  “<금강경>, <법구경>, <인간 석가> 등의 불교 서적을 읽으며 시련을 이겨냈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민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던 지난해 11월9일 총무원장 스님은 청와대에서 그녀와 독대하며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두를 던졌다. 이 말의 의미를 진작 이해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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