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세조 등 조선 왕실의 많은 사연 간직

 

조선 초부터 관음신앙처로 유명

수조각승 법잠스님 조성 보살상

임실 신흥사 적조암에서 ‘이운’

남순동자상, 해상용왕상 ‘협시’ 

서울 흥천사 관음보살삼존상. 왼쪽부터 남순동자상, 관음보살상, 해상용왕상.

서울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는 아파트 빌딩 숲 속의 공원처럼 돈암동 일대 주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심 사찰이다. 입구의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마당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조선 후기 왕실 인물들이 기도하며 머물렀던 대방(大房)이 펼쳐진다. 대방은 사찰에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조선 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흥천사를 비롯해 수유리 화계사, 홍릉 청량사, 남양주 흥국사, 파주 보광사 등의 대방이 유명하다.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조선 말기의 상황을 반영해 염불 수행 공간과 누, 승방, 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함께 갖추고, 대웅전을 실제적 상징적 불단으로 삼아 염불 수행을 하도록 구성된 형식의 복합 법당이 대방이다. 대방에는 중생의 소리를 듣고 언제 어디서든 구해주는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상이 있고, 좌우에는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이 있다. 

현재 흥천사 대방인 만세루와 주 불전인 극락보전은 수리 중이어서 관음보살상은 관음전을 임시 봉안처로 삼고 있으며,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은 별도로 보관 중이다. 흥천사는 조선 초부터 관음신앙처로 유명했으며, 이를 상징하듯 극락보전에 42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이 계시고, 대방인 만세루에는 전북 임실 사자산 적조암에서 조성해 흥천사로 옮긴 관음보살상이 중생을 맞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정치적 조언자로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끼친 신덕왕후 강씨(1356~1396)의 능인 정릉의 원찰로 1397년에 창건된 흥천사는, 당시에는 17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의 관습을 따라 개경 출신의 경처(京妻)와 고향 출신의 향처(鄕妻) 두 사람의 정실 부인을 두었다. 향처는 청주 한씨로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인 1391년에 세상을 떠난 신의왕후(1337~1391)이고, 경처는 이방번과 이방석을 낳은 신천 강씨 신덕왕후이다. 

신덕왕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 이성계는 왕궁 근처에 무덤을 만들지 못하는 당시의 관습을 깨고,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곳인 현재 덕수궁 부근 정동에 신덕왕후의 능과 명복을 비는 흥천사를 조성했다. 조선 초 흥천사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참배하고자 했던 곳이었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초 대표적인 관료 문인인 성현(1439~ 1504)이 지은 시에는 흥천사에 머물다 산으로 돌아가는 의근(義根)스님과 헤어지면서 묘사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흥천사 큰 절은 기원정사와 같은데/ 사리를 모신 전각 외관도 화려하네/ 등불이 줄을 잇고 당번(幢幡)이 즐비하며/ 이불 차는 동자들도 이름난 스님이라네.” 급고독장자가 부처님께 보시한 기원정사와 흥천사를 빗대어 왕실의 원찰임을 강조했고, 고승들이 많이 머문 유명한 사찰이기 때문에 잠버릇이 심한 나이 어린 동자승도 모두 이름난 스님으로 표현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신덕왕후의 능은 현재의 정릉으로 옮겨졌지만 흥천사는 세종이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할 정도로 원 위치에서 왕실의 원찰(願刹)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1504년 1차 화재 후 또 다시 유생들의 방화로 1510년에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후로 150여년 동안이나 거의 방치상태에 있던 정릉이 정비되면서, 능 부근 함취정 옛터에 신흥사(新興寺)라는 이름으로 1669년에 재건립되어 흥천사를 계승했다. 그러다가 정조(1752~1800) 때인 1794년에는 현재 흥천사가 있는 돈암동으로 다시 옮겨졌다.  

신흥사로 중창될 당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은 정조를 비롯해, 순조와 그의 장인 김조순(1765~1832) 그리고 아내 순원왕후(1789~1857)이다. 특히 김조순과 순원왕후는 1829년 석조 약사불상 조성과 1832년 괘불 조성에 시주자로 동참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흥천사는 왕실과 또다시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효명세자(1809~1830)는 스물 두 살인 1830년에 요절했는데, 1829년에 효명세자가 병이 나자 치유를 위해 외할아버지인 김조순과 어머니 순원왕후가 중심이 되어 약사불상을 조성했다. 바로 서울 화계사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신정왕후 조씨(1809~1890)가 효명세자의 부인이다. 

조선 초부터 관음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흥천사에는 여러 구의 관음보살상이 있었을 것이다. 세종 32년(1449)에는 임금이 병이 나자 흥천사에서 관음법회를 열었고, 세조 역시 먼저 죽은 아들 의경세자를 위해 불상 한 구와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을 조성해 사리각에 봉안했다. 세조가 조성한 관음보살상은 바로 극락보전에 봉안된 42수 관음보살상일 가능성이 있다. 

현재 관음전에 계시는 관음보살상은 1701년에 수조각승 법잠(法岑)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크기는 67cm의 중형 보살상이다. 원래는 전북 임실 사자산 신흥사 적조암에 모셔져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현재의 장소로 옮겨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종 2년인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와 대방이 건립되었고 사찰명이 원래 이름인 흥천사로 회복되면서, 폐사된 적조암의 관음보살상이 이즈음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왕실 원찰에는 폐사에 이른 절의 불상이나 범종을 옮겨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중창한 서울 화계사 명부전 존상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지장삼존상을 비롯해 25구의 화계사 명부전의 존상들은 1649년에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서 조성된 상으로, 1877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화계사로 옮겨진 대표적인 예이다. 

1701년에 조성되어 봉안되었던 임실 사자산 적조암은 어디일까. 바로 지금도 남아 있는 임실 신흥사의 산내 암자였다. 신덕왕후 능침 사찰인 신흥사가 1699년 정릉 근처에 건립된 후 흥천사로 다시 사찰명을 바꾸기 전인 1849년에 적조암을 창건했다. 서울 삼각산 신흥사 적조암과 임실 사자산 신흥사 적조암은 장소만 다를 뿐 사찰명과 암자명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흥천사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에 관한 기록은 1890년에 그려진 ‘흥천사 아미타회상도’와 ‘흥천사 신중도’에서 찾을 수 있다. 1890년 10월에 대방의 여러 불화를 조성하고 아미타불상과 관음보살상 그리고 원불(願佛)을 개금하고,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을 새로 채색을 한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선재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데 문수보살의 인도로 남쪽으로 순례해 53명의 선지식을 만난 후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불도(佛道)를 이루었다고 해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불린다. 관음보살상 좌우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배치된 것은 1655년에 조성된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관음보살상과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해 보리암 보광전 목조관음보살 불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 후기 수월관음도의 좌우에는 선재동자와 용왕상이 좌우 대칭적으로 배치되는 도상이 유행했다. 

흥천사 남순동자상은 머리칼을 묶은 쌍 상투 형식의 동자머리를 한 채,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다. 수월관음도의 남순동자(선재동자)는 항상 관음보살을 향해 합장하고 있기 때문에, 1701년에 관음보살상과 함께 조성했다면 우협시였을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똑바로 선 것으로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몸을 굽히고 있다. 이런 자세는 합장한 채 관음보살을 향해 법을 구하고 있는 수월관음도 속의 선재동자와 같은 모습이다. 연꽃 위에 놓인 정병을 들고 있는 흥천사 남순동자상은 수월관음도와 목조 불감에 표현된 합장한 모습의 남순동자(선재동자)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남순동자상과 서로 대칭되어 배치된 해상용왕상은 왼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고,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을 좌우로 배치한 흥천사 관음보살상은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도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특히 두 손으로 정병을 들고 있는 새로운 모습의 남순동자상은 다른 예를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예이다. 

[불교신문3293호/2017년4월26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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