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앎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깨달음이란 

고행 또는 지고한 선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냐

주관적 잣대 버리고 

사실을 그대로 보는 

중도(中道)가 곧 깨달음

독화살을 맞았으면 

누가 쐈는가 따지기 전에

몸에서 빨리 빼내야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의존해야만 살 수 있다’

중도에서 나오는 무아-연기

미묘하지도 난해하지도 않아 

깨달음이란 지독한 고행이나 지고한 선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중도에 관한 통찰이다. 사진은 한 스님은 꽃길을 걷고 있는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우리도 부처님처럼 정진하자고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처럼 정진하는 것입니까?”라고 불자들에게 물어보면, 보통 6년 고행이라고 말한다. 뼈만 남은 앙상한 고행상을 떠올리며, 붓다가 극한적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우리도 그러한 고행을 따라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깨달음은 고행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후일 붓다가 자신보다 더한 고행을 한 이는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고행을 했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붓다는 고행을 미련 없이 버렸다. 

붓다의 깨달음은 높은 선정의 경지로 얻은 것도 아니다. 붓다는 왕궁을 나선 직후 당대 최고로 알려진 선정의 대가들을 찾았다. 알라라 깔라마로부터 배워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얻었고, 웃다까 라마뿟다로부터 배워 선정의 최고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다다른다. 

스승들과 같은 경지의 선정에 도달하여 평온은 얻었지만 선정이 붓다 자신의 물음에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자 붓다는 과감히 선정주의를 버리고, 주로 출가사문들이 행하던 고행에 들어갔다. 당대 종교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선정과 고행 모두 최고의 경지까지 가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으니 그 좌절감이 어떠했을까? 아마 앞이 막막하고 캄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자타가 공양올린 유미죽을 먹으며 힘을 차렸고, 다시 보리수 아래 앉았다. 선정과 고행, 두 극단에서 벗어난 붓다는 오로지 지금 여기에 직면한 존재의 실상(자신의 참모습)을 알고자 하는 오롯한 마음으로 관찰 사유했다. 두 극단을 벗어던진 붓다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과 앎이 생겨났다. 아함경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고락)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되고, 지(智)가 되어 적정(寂靜), 증지(證智), 정각(正覺),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다.”

붓다가 첫 번째 깨달은 것은 선정·고행주의라는 양극단의 태도를 버리고,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본 중도다. 중도를 쉬운 말로 옮기면 ‘있는 그대로의 길’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할 때의 여실(如實)이 바로 중도를 의미한다. 

흔히 중도라 하면 ‘고락중도(苦樂中道)’를 말하고, 이 때 ‘고’는 고행으로 ‘락’은 쾌락으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락’을 싯다르타가 왕자 시절 누렸던 향락으로 해석하지만, 붓다의 삶을 살펴보았을 때 너무 좁은 해석이 아닌가한다. 왕자로서의 쾌락은 이미 출가를 통해 벗어 던졌기 때문에 오히려 ‘락’을 출가 직후에 경험했던 수정주의(修定主意), 혹은 선정주의로 해석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중도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쉬운 뜻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결코 적당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사를 자신의 주관적 잣대로 본다. 사실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필터로 투과해서 보는 것이다. 중도로 보았다함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고정관념,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극단을 버린 중도가 실제 수행이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다. 어느 날 말룽끼야뿟다라는 제자가 다가와 붓다에게 묻는다. 

“세존께서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한계가 있는가? 없는가?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다른가? 깨달은 사람은 죽은 뒤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말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듣고 싶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면 머물러 함께 수행하며 거룩한 삶을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겠습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말룽끼야뿟다에게 수행에 조건을 다는 태도를 꾸짖은 후 이렇게 일러준다.

“말룽끼야뿟다여, 지금 여기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합시다. 그의 친구가 와서 그를 의사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나를 쏜 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귀족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그의 이름과 성은 무엇인지, 그의 키가 큰지 작은지, 그의 얼굴이 검은지 하연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보통의 활인지 석궁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문제를 알기도 전에 죽을 것입니다. 말룽끼야뿟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문제에 해답을 얻고서야 비로소 수행하며 거룩한 삶을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갈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다경’)

제자의 질문은 지금-여기에서 직접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고통(삶의 참모습)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문제다. 또한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대답을 해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논쟁만 계속될 뿐, 지금 여기에서 해탈열반의 삶을 누리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길, 중도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는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신속하게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듯이 지금-여기 삶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길, 중도의 길이다. 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중도를 깨달은 붓다가 계속 중도의 눈으로 관찰 사유하자, 두 번째 깨달음인 연기-무아의 앎이 생겨났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무상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분리독립된 것은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도 없다. 무상, 고, 무아가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붓다는 중도의 열린 눈으로 집중 관찰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연기-무아라는 존재의 실상을 보게 된다. 영원불멸의 아트만을 상정한 상주론(常住論),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론(斷滅論)의 양극단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관찰사유한 끝에 이루어진 위대한 깨달음이었다. 

붓다는 연기법은 세상 자체의 이치이며, 자신은 본래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종종 말했다. 아함경에는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도리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였고, 또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본다”고 하였다. 남방, 북방불교를 막론하고 붓다가 깨달은 핵심이 중도, 연기법이라는 것에는 별 이론이 없다. 

조선 초기 간행된 언해불전에는 깨달음을 ‘아롬’, 무지를 ‘모롬’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깨달음은 미묘한 선정이나, 극한의 고행으로만 얻어지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것도 아니다. 붓다가 그리하였듯이 누구든지 중도, 연기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붓다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깨달음을 한 순간도 쉼 없이 치열하게 사유하고 실천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완성시킨 데 있었다. 

[불교신문3287호/2017년4월5월자] 

도법스님 조계종 화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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