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 많은 것은 세속적ㆍ물질적 축복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정신적 축복

돈 늘면 좋지만 ‘자발적 가난’ 선택한

수행자는 돈이 준다고 슬퍼하지 않아

부처님은 분명 돈을 열심히 벌고 돈이 많으면 복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불교는 돈이 정말 중요하고 부자가 되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돈이 최고는 아니고 전부도 아니다. 경전을 보면 염라왕은 부자로 태어나고 동시에 깨달음을 위해서 출가해 도를 배우겠다는 원을 세우고 있다. 재물을 얻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해 궁극적으로 지혜와 참된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질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어야 불교가 추구하는 중도가 실현된다. 비록 재물을 얻었지만 재물에 빠지지 않고 극복해 깨달음의 길로 가야한다. 재물이 많은 것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이라면 도를 배워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정신적인 축복이다.

<중아함경>에는 행복을 위해서는 재물이 풍족해야 한다는 필요조건 이외에도 깨달음의 길을 가는 추가 요건이 필요하다고 설한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지극히 크고 부하고 즐거워 재산이 한량이 없고 목축과 산업이 헤아릴 수 없으며, 봉호(封戶)와 식읍(食邑)과 여러 가지를 구족한 집에 태어나리라. 태어난 뒤에는 깨달음의 근(根)을 성취하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른 법의 율에 깨끗한 믿음을 얻기를 원하고, 깨끗한 믿음을 얻은 뒤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며 오직 위없는 범행을 마치고 현재에 있어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뜻을 알리라.”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의 최고 엘리트가 사람을 속이고 무한경쟁 속에서 미친 듯이 일하며 “돈, 돈”하는 생활이 싫어 직장을 그만둔다. 이들이 시골의 조그마한 마을 도서관에 근무하거나 산림감시원으로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생활을 ‘자발적 빈곤’이라고 부른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돈이 최고가 아니기에 이들은 돈 버는 생활을 포기하고 ‘소욕지족’의 삶을 산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면서 깨달음의 길을 병행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여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돈이 적어야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일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깨달음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출가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은 세속의 삶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세속의 삶이 도움이 된다면 왜 출가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출가할 수 없기에 세속에 살면서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의 삶을 살면 된다. 일본에서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작은 것에 만족하며 소욕지족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사토리 세대, 즉 ‘득도 세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나이든 사람보다 더 높기에 혹시 젊은이들이 이미 소욕지족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욕심을 낸다면 삶은 더욱 불행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포자기나 의기소침이 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아니다. 다만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한국의 젊은이들로부터 삶에서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많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마치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는 월스트리트의 소수 엘리트처럼 재벌기업이나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장을 꿈꾸지 않고 소박한 공무원을 꿈꾼다. 이것 또한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미 느낀 것이 아닐까? 증지부(增支部)에는 부의 다섯 가지 전제를 명심했는데도 재산이 감소할 경우 ‘부가 전제로 하고 있는 그것들을 내가 명심하고 있는데도 재산이 나로 인해 감소해 가는구나’라고 생각하여 후회하지 않고, 재산이 증대하면 ‘부가 전제로 하는 것들을 명심하였기 때문에 재산이 증대하는 것이로구나’라고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돈이 중요하지만 최고도 아니고 전부도 아니기 때문에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로서 살아야 재산이 감소해도 담담하게 볼 수 있고 재산이 증대해도 담담하게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돈이 늘어나면 좋겠지만 수행자는 ‘자발적 가난’으로 재산이 줄어들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불교신문3284호/2017년3월25월자] 

윤성식 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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