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붓다임을 모르고 하는 자비는

유루복(有漏福)…평생 가도 중생

스스로 완성된 고귀한 존재라는 자각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열쇠

삶의 의미를 제 안에서 못 찾고 

밖으로만 헤매는 게 현대인의 불행

생명들의 행복 위해 열정 불태우면

당신의 삶이 참되고 풍요로워질 것 

자신이 본래붓다임을 인식하고, 뭇생명과 동체대비로 어우러져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사진은 지난 1월24일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한 종단 집행부 스님들이 서울 광화문역 해치마당에 설치된 장애인 차별반대 농성장을 찾아 가난으로 목숨을 잃은 장애인들을 추모하는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2010년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종단은 결사운동의 방식으로 활로를 찾고자 하였다. 이즈음 이판(理判) 쪽에선 적명, 고우, 무비스님 등이 사판(事判) 쪽에선 총무원장 스님과 종회의장 스님 등이 참여하는 결사자문위원들은 봉암사에 모여 ‘제도개혁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의식개혁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 뒤 몇 차례 논의를 통해 의식개혁의 핵심방향을 ‘중도로 본 본래붓다와 동체대비’라는 불교관과 실천론을 정립하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중도, 본래붓다, 동체대비는 불교의 본질을 설명하는 말로, 우리 불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다. 하지만 그 뜻을 정확히 모르면 상투적이고 의례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 가운데 붓다가 깨달은 내용 중 하나인 중도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고, 이번호에서는 본래붓다와 동체대비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인간의 참모습이 본래붓다’라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예를 들어보자. 여기 똑같이 복을 짓는 두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미완성의 죄 많은 업보중생이므로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 혹은 지옥에 가지 않고 극락가기 위해 복을 짓는다. 반면 어떤 이는 완성된 본래붓다이므로 지금 당장 진리를 실천하는 붓다행으로 아무 조건 없이 복을 짓는다. 이 둘의 차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지금여기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붓다임을 모르고, 스스로 업보중생이라는 무지와 착각, 낡은 믿음에 사로잡혀 짓는 복은 유루복(有漏福)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짓고 또 지어도 끝내 중생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허망한 복에 불과하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무지의 복이므로 갈등과 대립, 불안과 공포의 삶을 되풀이 하게 한다. 

이에 비해 자신의 참모습이 완성된 본래붓다라는 자각과 확신을 갖고, 그 무엇도 구하는 마음 없이 기꺼이 붓다행으로 짓는 복은 무루복(無漏福)이다. 쓰고 또 써도 끝이 없는 바닷물처럼 그 복이 영원하고 무한하다. 진리를 실천하는 깨달음의 복, 지혜의 복이므로 삶을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한다. 

똑같은 모양을 하고, 똑같은 행위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중생의 행이 되고, 어떤 경우는 붓다의 행이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스스로를 제약하고 옭아매는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완성된 고귀한 존재라는 자각과 확신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자신이 붓다임을 자각하고 구함 없는 마음으로 붓다행을 하면 누구든 그는 붓다로 사는 것이지만, 아무리 붓다처럼 행위한다 해도, 더 구하고 얻으려는 중생의 마음으로 하면 중생놀음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은 더 좋은 것을 얻겠다는 조건부의 마음으로 선행을 하는 이가 범부이고, 아무 조건 없이 선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가 성인이라고 하였다. 간디는 진정으로 진리를 온전히 실천하는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는 태양처럼 빛날 것이고, 온 우주가 그의 삶에 화답할 것이라고 하였다. 20세기를 이끌었던 대표적 지성들은 이렇게 자기완성에 대한 자각과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여부에 따라 과정에서부터 결과까지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모두 본래붓다의 뜻과 닿아있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붓다’라는 것과 정반대의 인식은 “저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낙인찍고 옭아매는 것이다. 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고 무자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600년전 붓다가 태어난 인도가 그러하였다. 계급과 신분의 차이, 약자에 대한 가혹한 통치의 저변에 “인간은 죄많은 중생이라 어쩔 수 없다”는 ‘부정적 인간관’이 깊게 깔려 있었다. 붓다는 그 무지의 어두움을 용감하게 떨쳐 내었다. 붓다는 지금 비록 신의 이름을 앞세워 인간이 덧씌운 편견과 관습 때문에 차별과 억압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당신의 참모습은 본래 붓다’라고 선언하였다. 얼마나 거룩하고 고구정녕한 한 마디인지 깊이 새기고 새겨야 할 일이다. 

붓다의 불교를 논하면서 만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가 본래 완성된 고귀한 존재”라는 그 한마디가 자신의 삶에서 만난 가장 큰 위안이자, 전환을 이뤄낸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오늘 붓다가 우리 옆에 계시다면 2600년 전 그날처럼 지친 우리들의 등을 다독이며, 쉬운 일상의 언어로 본래 붓다로 살라고 끝없이 격려했을 것이다. 

누구도 차별 없이 진리의 세계로 향하도록 이끄신 붓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삶이다. 동체, 즉 우리 모두는 인드라망의 그물코처럼 깊이 연결되어 있는 한 몸 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대비, 즉 큰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것은 생명의 이치에 순응하는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몸 한 생명이라는 자각은 자연스레 만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실천으로 이어지고, 그럴수록 우리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은 심화된다. 진리가 이러함을 깊이 이해하면 조건 없는 연민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동체와 대비는 손바닥의 앞뒤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동체대비의 길은 어떤 것일까? 오늘날 현대인들의 고통 대개는 삶의 의미를 제 안에서 찾지 못하고 밖을 향해 정신이 팔린 채,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진데서 발생하는 것들이 많다. 근대 자본주의 성립 이전까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으로 태어나면 양반으로 살다 죽었고, 노비는 죽을 때까지 노비였다. 태어날 때부터 삶의 방향과 범위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일부 지식층에만 허용되었고,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금기시 되었다. 

신분제가 해체된 뒤에는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다. 양반이니 노비니 하는 운명의 굴레가 사라진 반면 스스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예전엔 사회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알려주었다면, 이젠 그러한 틀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칠흑 같은 자기만의 골방으로 숨거나, 스스로 알지 못하는 어딘가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는 것을 되풀이한다.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생놀음에 빠져 크고 작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붓다라면 이렇게 이르셨을 것이다. 

“당신은 본래 붓다입니다. 당신은 자기 삶의 창조주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골방으로 숨거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바보처럼 또 다른 무엇을 찾아 어디론가 방황하지 마세요. 뭇생명이 깊이 연결된 한 몸 한 생명임을 잘 알고, 그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세요. 그 때 당신의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본래붓다와 동체대비는 고루한 옛 말이 아니다. 오늘 이 시대에 무지로 인해 삶의 질곡에 빠지고, 관계의 고통 속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본래붓다와 동체대비는 삶의 활로를 열어줄 단비 같은 좋은 선물이다. 개인의 삶에서부터 공동체와 사회를 이롭게 하는 훌륭한 세계관의 토대로도 손색이 없다. 

누군가 우려하며 묻는다. 인간이 이미 완성된 존재라면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는 교만에, 저만의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겠는가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 본래붓다와 동체대비 또한 깊은 연기적 관계이다. ‘자신이 행위하는대로 창조되는 존재’라는 진리를 잘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면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에서 일상의 평화와 자유로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고, 모든 존재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기꺼이’ 역동적으로 살게 된다. 

자신이 본래붓다임을 인식하고, 뭇생명과 동체대비로 어우러져 사는 삶. 어떤가? 불교의 대의를 이보다 더 멋지고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도법스님 조계종 화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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