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답게 여래를 보는 방법

깨달음은 형상과 언어로 표현된 

여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또한 

실제로도 그 경지에 이르러야…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훌륭한 신체적 특징을 다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한 신체적 특징을 다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훌륭한 신체적 특징을 갖추었다는 것은 곧 신체적 특징 갖춤이 아닌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훌륭하고 뛰어난 모습이란, 그 모두가 허망한 것일 뿐이니, 만일 모양과 모양 아님을 모두 본다면 곧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니라.” 

제5분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참답게 보라’는 제목을 걸었다. 무엇을 참답게 보라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理)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알면 봐야할 것이 분명해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끝도 깨닫는 것이다. 깨닫기 전에는 괴로움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의 삶이란 단순히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강조된 것처럼 자신과 모든 사람들이 깨닫도록 노력하는 삶을 뜻한다. 그럼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여래를 만나는 것이다. 여래를 만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여래가 됨을 뜻한다. 여래는 여래만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如來, Tathgata)란 드높은 깨달음에 도달하여 그곳에 머물지 않고 중생에게로 오신 분이라는 뜻이며,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설명으로도 너무 막연하다. 그래서 여래에게 다가가는 열 가지 측면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여래의 별칭인 여래십호라고 한다. 십호(十號)란 모든 천신과 인간의 공양(대접)을 받을 수 있는 분(應供), 바르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으신 분(正遍知), 세상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다 아시고 올바로 실천함이 완벽하신 분(明行足), 고통의 바다를 잘 건너서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신 분(善逝),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는 분(世間解), 가장 뛰어나신 분(無上士), 중생을 잘 이끄시는 어른(調御丈夫), 천신들과 인간들의 스승(天人師),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신 분(佛),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신 분(世尊)이다.

보살의 수행이 모든 이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러 여래를 보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을 중생과 외형적으로 구분하는 대표적인 것이 32상 80종호로,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서른두 가지의 위인상과 여든 가지의 훌륭한 특징이다. 부처님께서 바로 이것을 들어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셨다. “훌륭한 신체적 특징을 다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이에 답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신체적 특징 갖춤이란 것이 그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특징만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첫 번째의 게송이라고 일컬어지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까지의 <금강경>을 보면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을 잘못 번역했다. 이 부분은 ‘만약 모양과 모양 아님을 모두 본다면’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제까지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를 얘기하고 이사무애(理事無碍), 즉 이치(理)와 현상(事)의 원융(圓融)을 얘기하던 불교가 <금강경>에 와서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여래를 볼 때 수행에 의해 빛나는 모습을 갖추신 것도 봐야하고 여래의 십호도 잘 이해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없다. 결국 모양으로도 드러낼 수 없고 십호에 대한 언어적 설명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여래를 봐야하는데, 그 경지가 곧 깨달음이다. 다시 말해 깨닫기 전에는 여래를 완벽하게 봤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게송이 범본과 다른 한역본에서는 6구의 게송이며, 번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훌륭한 특징으로만 여래를 보려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훌륭한 특징으로만 여래를 보려고 하지 않으면 허망하지 않다. 이와 같이 훌륭한 특징과 특징이 아닌 것으로써 여래를 관찰해야만 한다.” 보살행이란 자신과 타인이 모두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데, 그 깨달음은 형상과 언어문자로 표현된 여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또한 실제로도 그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참답게 여래를 보는 방법이다.

[불교신문3282호/2017년3월18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