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불일’ 조계종 중천조      

巍巍一座大須彌    드높은 자리는 대수미산으로

無限風波不暫    끝없는 풍파가 잠시도 아닌데 

放普光明淸淨日    널리 광명을 놓아 청명한 날

照先東土破昏迷    먼저 동토를 비추어 혼미함을 깨웠네.

송광사에 모셔진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스님의 진영과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에 실린 보조국사찬(普照國師)이다. 찬을 지은 이는 보조스님의 제자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스님으로 무의자는 진각스님의 자호(自號)이다. 스님은 혼란한 세상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일깨움을 주신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찬을 지어 올렸다. 진각스님은 나주 출신으로 문장에 재능이 있어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태학에 들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귀향했다. 그 이듬해 모친이 작고하면서 송광산 길상사에 주석하던 보조스님에게 출가했다. 진각스님은 보조스님으로부터 간화선의 요체를 전수받았으며 스승 이후 법석을 이어받아 수선사의 종풍을 크게 일으켰다. 

조계종 중천조(中闡祖)인 보조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특정 스승을 두지 않고 수행 정진하면서 <육조단경>, <화엄신론(華嚴新論)>, <대혜어록> 등을 통해 선교일체와 간화선의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출세와 명리를 쫓아 점차 세속화되는 불교를 쇄신하기 위해 거조암과 송광사 전신인 길상사 등지에서 동료 스님과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했다. 길상사는 1205년에 희종이 직접 쓴 ‘송광산수선사(松廣山修禪社)’ 어필과 만수가사(滿繡袈裟)를 하사할 정도로 보조스님이 선(禪)도량으로 삼아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가르침을 펼쳤던 곳이다. 보조스님과 진각스님 이후 고봉법장(高峰法藏, 1350~1428)스님에 이르기까지 송광사에서는 16국사(國師)를 배출했다. 임진왜란 이후 송광사를 중창한 부휴의 문중은 태고보우스님에 앞선 선풍을 떨친 보조스님의 수행정신을 존숭하며 그를 기리는 전통을 이어갔다. 송광사는 국사전에 보조스님을 비롯한 16국사의 진영을 모시고 해마다 종조의 예를 표하고 세월이 흘러 진영이 낡으면 새로 조성해 승보사찰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에 근세에 활동한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은 조계종의 선풍을 세운 보조스님을 기리는 “해동의 불일로 광명을 펼쳐 조계 육조의 가풍을 크게 떨치고 원돈 법문에 정혜를 겸해 수선사 속에 구산이 통한다(海東佛日布光明 大闡曹溪六祖風 圓頓法門兼定慧 修禪社裏九山通)”는 찬을 남기기도 하였다.

[불교신문3281호/2017년3월15일자] 

해제=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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