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동 기자 사찰숲길을 거닐다] ⑬ 여주 신륵사 나옹선사길

 

사찰곳곳 나옹스님 전설 가득

극락보전 뒷편 수백그루 소나무 

철갑 두르고 병풍처럼 도열

유유히 흐르는 물길에는

자비방생 발길 사철 이어져

①신륵사에서 열반한 고려시대 고승 나옹선사의 법구를 다비했다고 전하는 삼층석탑과 나옹선사의 호를 따서 만들어진 강월헌 정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신륵사 여강(驪江, 남한강)에 서리가 내렸다. 전날 잠깐 내린 비가 나무에서 얼어붙어 때 아닌 ‘2월 상고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신륵사와 인연 깊은 나옹선사(1320〜1376)의 시(일각에서는 중국 당나라 한산스님 시라는 설도 있음)가 생각난다. 온통 하얀 서리가 남한강변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별천지 세상. 때때로 일찍 나들이를 하다보면 이른 새벽에 볼 수 있는 호사스런 광경이다. 그래서 신륵사 일대를 ‘나옹선사길’로 붙여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②신륵사 중심건물인 극락보전.

과거 신륵사로 향하는 길은 남한강물과 나란한 길이었다. 이제는 신륵사 관광단지 앞에 거대한 일주문을 건립해 대형 주차장을 따라 들어오는 길이 메인도로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 길도 바뀌는 이치던가. 사하촌 정비 차원에서 이루어진 신륵사 입구는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관광영역이 지나면 사찰 경내지가 시작된다. 최근에는 사찰 입구에 템플스테이 관이 건립되어 천년사찰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 

여주 강천보가 생겨 신륵사 앞 물길은 깊어졌고, 수량도 많아졌다. 물길이 막혀 정화가 잘 안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시비(是非)를 뒤로하고 겨울 강은 이제 봄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다. 겨울 강이 그리운지 시샘하는 추위가 봄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신륵사에는 나옹선사와 관련된 전설이 가득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를 제자로 둘 정도로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나옹선사는 음유시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일찍이 친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출가해 28세에 중국으로 유학해 고승의 경지에 이른 선사는 귀국 후 공민왕의 왕사로 활약한다. 고려시대 불교 총본산인 양주 회암사를 중창하기도 했다. 

③신륵사 모전탑.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 있다고 해서 신륵사는 한때 ‘벽절’로 불렸다.

하지만 선사의 만년은 쓸쓸했다. 선사의 법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법문을 듣기 위해 구름같은 인파가 회암사로 모였지만 음해하는 상소가 올라와 선사는 회암사를 떠나야 했다. 이미 병약했던 선사는 스스로의 병세를 알고 남한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신륵사에서 열반에 든다. 세속 나이 57세였다. 

당시 신륵사 봉미산에는 오색구름이 돌고 나옹선사의 말(馬)이 사흘을 먹지도 않고 울었다 한다. 선사의 법구는 가까운 여강에서 다비를 했는데 사리가 155과가 나왔다 한다. 제자들이 계속해서 염불하니 사리는 558과로 나누여 졌다고 한다. 국운이 기울어져 고려 말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던 나옹선사는 그렇게 떠났다. 

나옹선사를 다비했다고 전하는 강변에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는 나옹선사의 또 다른 호다. 편편한 화강암 바닥을 기단으로 삼아 서 있는 삼층석탑에는 선사의 사리가 모셔져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강월헌 위쪽에는 모전탑이 자리하고 있다. 벽돌을 쌓아올린 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탑으로 신라시대 형식을 계승했다. 사찰 창건이 신라 진평왕 때라고 전하니 역사의 유구함이 전해진다. 

④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

강물은 한번 지나온 길을 거스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새롭게 만나고 부닥친 일들에 대해 점검도 해 보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에 이르렀을 때 물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저 “열심히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며 흘러왔소”라며 당당해 할까. 아니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흘러온 것이 후회스러워 할까. 문득 그 마음을 내 자신에게 비추어 본다. 

“그대는 지금까지 50평생을 살며 최선을 다했소?”

“…” 

강변에는 ‘용왕대신’을 부르며 방생하는 불자들의 행렬이 철철이 이어진다. 지난 14일에는 도선사 사부대중 1000여명이 남한강에 생명을 방생하며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유봉준 신륵사 사무장은 “매년 전국의 사찰 불자들이 방문하고 있다”며 “부처님의 자비심이 교차하는 공간으로서의 ‘방생도량 신륵사’가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물길을 등지고 소나무 숲길로 발길을 돌린다. 봉미산 줄기 따라 조성된 소나무 숲길에는 100년 넘은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 서 있다. 천년고찰이 세워졌을 때 소나무의 후손들이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소나무 숲길에 들어서니 솔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늦겨울 찬바람이 오는 봄을 시샘하며 콧등을 시리게 한다. 

⑤신륵사 뒤편에 들어서 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 숲길.

숲에는 생멸이 상존하고 있다. 소나무재선충에 벌목된 한 무더기의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며 울창한 소나무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나무를 위한 보시’다. 생과 사가 어디 숲에만 있으랴. 한 걸음 한 걸음의 호흡지간에도 있도, 발에 밟히는 낙엽아래 땅에도 있다. ‘사는 게 죽음이고, 죽는 게 삶’이라는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짧은 생을 살다간 나옹선사의 선 굵은 삶은 ‘인생은 허투루 살아서는 안된다’는 유지처럼 가슴에 다가온다. 흘러가는 강물도 ‘두번 다시 오지 않는 삶’을 말없이 설파하고 있다. 신륵사 경내에서 온갖 무정설법이 들려온다.

‘불자들아! 지금 그대들의 삶의 궤적은 제대로 그려지고 있는가?’ 

신륵사 나옹선사 길

[불교신문3276호/2016년2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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