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이 잠든 적막 속 홀로 우는 풍경이여…

“우리가 감각하는 습관적 오감 넘어

이분법 인식 뛰어넘은 또다른 세계

부처가 득하고 노래한 깨달음의 경지”

대학시절, 처음 목탁을 손에 쥔 건 ‘효율적인 데모’를 하기 위해서다. 신학대 특유의 교조적 교칙과 규율에 항거하며 목탁을 들었다. 큼지막한 목탁을 땅땅 치면 넓지않은 캠퍼스가 쩌렁쩌렁 울렸다. 제대로 치려고 사찰 스님을 찾아다니며 목탁을 배웠다. 시위 시작은 예불로 열었고 반야심경 천수경 독경으로 교회재단의 부당한 학교운영을 질타했다. 때로는 목탁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을 향한 외침이자 울림이었다.

“잘 싸우려고 목탁을 배웠다”는 그는 서른 즈음에 소설가로 전업하면서 죽을만큼 방황했고, 죽지 않으려고 어느 작은 암자에서 한달을 살았다. 대청댐이 보이는 대전 외곽의 개인암자였고, 거기서 십수년만에 또다시 목탁을 잡았다. 비구니 스님이 살고 있는 암자였지만 토굴에 가까웠고, 그의 말로는 그 스님보다 자신이 목탁도 잘치고 염불도 잘했다고 했다.

목탁의 힘인지, 목탁소리의 영험인지 모르겠지만 암자생활을 끝으로 방황은 갈무리됐다. 1년에 한 편 이상씩 술술술 소설이 태어났다. 아쇼카왕이 등장하는 장편 <비밀의 문>을 집필하기 전에도, 임꺽정을 따라 답사를 다닐 때에도 딱 한번 들렀던 안성 칠장사는 지금도 그가 마음에 담아둔 절이다. 사찰이 소설에 등장할 때면 칠장사를 떠올리며 마음대로 법당을 짓기도 탑을 올리기도 한다.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그의 소설 <풍경소리>에 나오는 사찰 역시 이름은 성불사지만 칠장사를 염두에 두고 그렸다.

60여년 전 정유년 닭띠해에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소설가 구효서. 그는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가다듬과 처음의 순간에 다시 서게 하는 생명연장의 기쁨을 누렸다고 했다. 그는 “소설이란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이 쓸데있는 것이 되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신재호 기자

소설가 구효서(60). 지난 14일 조계사 대웅전 흔들리는 풍경 아래서 그를 만났다. 가을산사의 풍경과 사찰을 찾아온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소설 <풍경소리>는 시조이자 노래로 유명한 ‘성불사의 밤’에서 시작된다. “오래 전부터 흥얼거렸던 시조노래죠. 짧은 싯구를 음미하다 어느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성불사 깊은 밤 그윽한 풍경소리가 들리는데,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이 소리를 들어요. 아 그러다가 마지막엔 객마저 잠이 들고 풍경소리 저홀로 울게 하여라…. 온몸에 전율이 왔죠. 우리가 바라보는 이분법 세계, 주관과 객관이 모두 잠들고 시공을 초월한 그 고요한 적막 속에 저홀로 울리는 풍경소리….” 소설가는 그 소리에 머물러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소리는 일종의 진언이기도 하고 우리가 절에서 익히 듣는 범종소리와도 유사할 수 있어요. 그 소리는 장자가 말하는 인공소리 인뢰(人籟)와 자연소리 지뢰(地籟)를 관장하는 천뢰(天籟)라고 봐요. 우리가 감각하는 습관적 오감을 넘어선 감각이자 인식을 뛰어넘은 인식 세계, 부처가 득한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공(空)을 두고, 함부로 없는거라 말해선 안되고 뭔가 있다고, 보았다고 까불어서도 안된다는 거죠. 하하하.”

‘그 소리’로 가득 찬 공간이 바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했다. 대적(大寂). 엄청난 적막과 침묵이 가득한 대적광전에 부처님은 깨달음의 노래소리를 한가득 채워놓은 셈이다. “부처님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소리로 팔만사천경을 설해놓고도, 열반하실 때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하셨어요. ‘내가 지금껏 말로 표현한 것은 죄다 뻥이다, 다만 대적광전에 가득 채워놓을테니 가서 들어라’ 뭐 이런거 아닐까요? 그러지 않고 우리가 천년고찰에 들어가 무슨 힐링이 되고 어떤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소설 속 주인공 미와는 달라지고 싶으면 성불사에 가서 풍경소리를 들으라는 친구의 제안으로 성불사에 갔고, 거기서 날마다 풍경소리를 들었다. 몇날며칠 바람에 스쳐 땡강땡강 울리는 풍경소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승이라 불리는 주지 스님과 수봉스님, 영차보살과 공양주 좌자, 함씨거사 등 성불사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왜?”라는 물음이 없고 논리와 소유가 아닌 오직 자연에서 얻은 음식과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등 무한한 시공의 세계에 더불어 살면서 미와는 미혼모 엄마의 삶을 공감하고 느닷없는 엄마의 죽음마저 받아들인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손에 쥐고 ‘길을 걸으며 두고두고 나에게 물어야 한다’고 되뇌인다. 미와에게 풍경소리는 마침내 작가가 말하는 ‘천뢰(天籟)’로 울려온다. 주승도 수봉도 좌자도 잠든 성불사의 밤에 바람 한점 없고 달빛만 고요한 대적광전 처마끝에서 요란한 풍경소리가 무찌르듯 흘러갔다.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소리이자 부처의 소리, 묘음(妙音)이다. “그 소리를 미와가 들었으니 이제 게임 끝이죠. 하하하.”

그가 말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2500년 전 그것이 아니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이 세상 불교 아닌 것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현상은 2500년 전 부처님이 죄다 말씀하셨다고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이미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삶은 늘 새롭게 순간순간 생겨나고 소멸하고 변화하죠. 당장 촛불집회에만 가도 수많은 보살들이 거기에 있더군요. 자기들이야 보살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 시대 어디에도 없던 보살이 저기 또 있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부처님의 광활한 세계가 확장되는 거잖아요.” 구효서 작가가 품고 있는 ‘불교’는 흥미진진하고 다채롭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최적화된 식재료이자 삼라만상 우주공간을 넘나드는 언어과학이요 철학이다. “검을 현(玄)을 왕년에는 가물 현이라 불렀는데, 검은 어둠과 가물가물한 어둠은 차원이 다르다…. 투명하고 맑은 기운이 엄청나게 깊어지면 가물가물하다가 이내 어두워지는데 이는 우주의 색깔이다…. 불국사 석굴암에서 가물한 느낌의 위력을 실감하고 전율에 떨었는데 지금은 어이없게도 형광등이 환하게 걸려 있어 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언젠가는 불국사 석굴암과 다보탑 석가탑을 담아 불운의 천재조각가의 생애를 소설로 엮을테다….” 소설가 구효서가 보고 듣고 느끼는 부처님 세계는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거룩하고 구슬프고 아름답고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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